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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지 Aug 23. 2020

패션지 에디터와 비주얼 기획자가 가장 힘든 날

 이 직업 증후군도 산재처리가 되나요?

오전 2시에 마칠 예정이던 촬영은 새벽 4시가  돼서 끝이 났다. 짐을 챙겨 택시 안에 몸을 실었다. 피로에 딱딱하게 굳어진 신체와 정신은 아니러니 하게도 가장 연약한 상태였다. 무엇이든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형태를 잃고 산산이 부서져 고운 연기처럼 사라질 듯이. 아니  편이 차라리 나을 듯이.

 오랜 기간, 매달 중순이면 어김없이 — 15 혹은 17그런 기분이 들곤 했다. 각각의 날짜는 몸담았던 패션지의 마감일이다. 마감일에서 거꾸로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을 흔히 마감기간이라 칭하는데,  기간 동안 에디터들은 막바지 취재와 촬영을 해치우고, 그간 촬영한 데이터를 모아 편집장에게 보고하며, 사진과 레이아웃을 고민하고, 원고를 완성해 기사를 마무리한다.

마감은 지독한 녀석이다. '매달 하는 일인데 ' 하고 짐짓 무딘 척을 해봐도. '지금쯤은 익숙해질 만도 했지' 하고 호기로운 척을 해봐도. 어느 달이나 마감은 처음 겪어보는 역경처럼 신선하고도 잔인하게  멱살을 쥐고 흔들며 한계를 시험한다.

일단 마감 기간에 돌입하면 마감의 증후는 곳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라 빠르게 포착된다. 종일 사무실에 둥지를 틀고 앉아 있기에 시간  날씨와 계절 개념을 상실하고기가 막히는  밖이 낮인지 밤인지, 겨울인지 여름인지는 잊어버려도 날짜 개념만은 놓치지 않는다는 . 목숨줄과 직결된 감각이므로—, 끼니의 구분이 점차 흐려지며 책상머리엔  과자 껍데기,  봉지, 반쯤 마시다  음료  따위가 쌓여간다.  과정에서 소화 불량은 필연적이다. 낯빛은 해가  떨어진 하늘색처럼 급격히 어두워지며, 몸이 붓기 시작하고 피부에는 뾰루지가 하나 , 올라오기 시작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동료들의 상황도 다를 바가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 멋쟁이처럼 세련된 모습의 기자들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정수리에 도넛을 하나씩 올린, 후줄근한 면티와 ‘쪼리차림으로 저마다 묵묵하게 마감과 싸우고 있는 전우의 모습을 목격할  있다. 해당 기간, 나는 최선을 다해 거울을 외면한다. 그럼에도 거울 속의 그는  앞을 막고 서서 총기를 잃은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하는  같다. ‘ 그러고 사니.’

마감의 중심에서 진심을 다해 마감을 저주한다. 내게 자유와 정시퇴근, 건강한 식습관과 생활습관, 일상, 철학, 가치관을 무참히 앗아가는,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 않는 극악무도한 마감이란 놈을. 이때처럼 집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도 없다. 마감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은 최대치로 흥미로워진다. 다음 마감까지 철저하게 외면할 결심도 하나  늘어간다. ‘마감이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늘어지게 자야지’, ‘마감이 끝나면 000  만나야지’, ‘마감이 끝나면  요가원에  테야’, ‘마감이 끝나면  책을/영화를/전시를 봐야지’, ‘마감이 끝나면....’ ‘ 지긋지긋한 마감만 끝난다면...’

그래서 마감일의 감정 변화는 참으로 이해할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자유를 손에 얻자마자 돌아가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마는 자신을. ‘ 끝났다고? 이렇게 정말 끝이라고?’, ‘그럴  없어. 분명    남아 있을 텐데!’ 해방감에 도취돼 환호를 질러도 모자랄 판에, 마감이 끝나자마자 마감을 그리워하며 마감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미련 많은 미련한 꼴이라니!

마감이 끝나면  비어버려 무게를 잃어버린 가슴을 부여잡고 가까운 길도 부러 굽이굽이 돌아가곤 했다. 너무 쓸쓸해서 상대도 없이 홀로 이별하는 기분이었다.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귀가하면, 곧장 욕실에 들어가 콸콸 끓는 물줄기로 마감의 찌꺼기를 벅벅 씻어내려고 했다. 허물을 벗듯 마감도 벗어버리면 좋을 텐데, 뽀얀 얼굴로 침대에 누우면 오랫동안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곤 했다. 피로를 푸는 것도, 마음을 다잡는 일도 꼬박 하루가 걸렸다.  

엔터테인먼트로 이직하고 나선 마감 병이  사라질  알았는데 어마어마한 오산이었다. 촬영이 늘고, 스텝도, 노력과 고생도  배가 되니 오히려 증세도  자주,  가혹하게 찾아온다. 점입가경. 인간만사 새옹지마.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로다. 기획부터 아티스트 본인을 포함해 다수의 매니저, 감독, 사진가, 그래픽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헤어 메이크업 전문가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달을 내리 매달리고, 고민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은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뿌듯함을 느끼기가 무섭게 외로워진다. 바닥인  알았던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고,  깊은 지하로 떨어진다.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불량 나침반처럼 방향을 잡지 못한다.

모든 것을 끝냈지만 그 무엇도 떨쳐내지는 못하는 귀갓길,  때는 음악 듣는 일도 신중해야 한다. 음표가 만드는 멜로디의 곡선은  가팔라지고, 가사는 귀에 퍽퍽 꽂힌다. 섣불리 선택한 음악을 듣다가 이내 미간에 깊은 골짜기를 파고  양쪽으로 바닷길보다 서러운 물길을 만드는 일이  번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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