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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지 Mar 18. 2021

비 생각


그해 여름, 유독 비가 자주 그리고 많이 내렸다. TV를 틀면 몇 년만의 비, 몇 년만의 기록이라는 뉴스가 몇 번이나 흘러나왔던 것 같다. 얼마 만의 더위, 얼마 만의 추위 같은 보도는 어쩐지 매년 들리는 것 같아 맘 놓고 믿을 수도 없지만, 최소한 내가 기억하는 한국의 계절 중에 가장 촉촉했던 건 사실이다.  


비의 재발견. 햇살 아래 에너지를 받는 사람이라 우중충한 날씨를 잘 탄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놀랄 만큼 괜찮았다. 세 달에 걸쳐 온 여름이 축축한데도 싫지도, 질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예상외로 홀로 표표히 비를 즐기는 동안 날씨에 다소 무감각한 사람들마저 긴 우기에 지친 나머지 비 좀 그만 내리면 좋겠다고 울상을 짓는 사태에 이르렀다.


가라앉기보다는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오염되는 것보다는 씻겨지는 것 같았다. 물이 풍성한 그 여름이 그저 차분하고 편안했다. 환한 날이 며칠 동안 지속되는 시기에 느껴지는, 정전기처럼 묘한 피로가 없던 것도 그 이유인 것 같았다. 연한 회색 비구름이 깔리고 비가 툭툭 떨어지는 날엔 애써 힘내거나 커피를 마신 것처럼 들떠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힘내’라는 말이 없어 힘이 되는 친구 같았다. 빗방울이 산소방울 같았다.


초여름 비가 시작되기 전 나타나 가을 햇살이 바삭해지기 전에 떠난 그 사람은 표현이 솔직하고 투박하고 직접적인 사람이었다. 예쁘다거나, 만나보고 싶다거나, 좋다거나 그런 말을 꾸밈없이 그리고 서슴없이 할 줄 아는 사람. 남자들은 그럴 때 귀엽다. 귀여워서 만났다.


그는 몸이 크고 체격이 단단했는데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비 오듯 땀을 흘렸다. 나는 땀을 좀처럼 흘리지 않는 체질이라 누군가 그렇게 더위를 타고 그토록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에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는 소나기처럼 일단 눈 깜짝할 새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기 시작하면 금세 상의가 축축해져 몸에 달라붙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이렇게 땀을 단시간 안에 많이 배출하면 수분 부족으로 쓰러지지는 않을까, 실시간으로 체중이 빠져 데이트가 끝날 즈음엔 엄지 공주처럼 작아져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끼니때마다 접시를 두 그릇씩 싹싹 비워내는 그의 먹성이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못했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를 떠올리면 비가 생각나는 데엔 그것 말고는 별로 떠올릴 게 없다는 뜻이다. 한 게 많이 없는 연애였다. 열 번쯤 졸라야 한 번을 나갔고, 그마저도 차로 코앞까지 데리러 와야지 겨우 얼굴을 비추었다. 일단 차에 오르면 다시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내리기도 싫어해서 공원에 도착해도 드라이브만 했고, 누가 갈증이라도 나면 그가 혼자 편의점에 들렀다가 돌아와야 했다. 나는 영락없이 다리가 마비돼 휠체어에 앉은 환자 같았지만 마비돼 끝끝내 열지 못했던 건 마음이었을 것이다.


비가 오는 계절에 차를 떠나지 않았으니 기억나는 것은 창밖을 두드리던 수많은 빗방울. 언제는 부슬부슬하고 말랑말랑한 비가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오래 지켜보았고, 어떤 날들은 차 지붕이 뚫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폭우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 타고 있는 차가 마치 커다란 타악기로 변해 기능하는 것 같았다.


비가 오는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음악을 듣는 일이다. 비가 소리를 가둔다고 해야 할까.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볼륨을 있는 대로 높이면 소리가 피부에 밀착돼 울리고, 마침내 온 멜로디가 몸을 감쌌다.


더 스트록스(The Strokes)의 더 오드 투 더 멧츠(The Ode to the Mets), 시가렛 애프터 섹스(Cigarette After Sex), 데이비드 보위, 조지 벤슨(George Benson)의 기브 미 더 나잇(Give Me the Night), 영화 블루 밸런타인의 수록곡인 유 앤 미(You and Me) 같은 곡. 그리고 수많은 클래식곡들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는 듣고 싶어 했던 곡들이 있었지만 결코 한국 노래는 안 들었다. 그 시기에 한국 노래를 들으면 가사들이 발목을 붙잡았다. 비에 젖은 청바지처럼 질척해질 것 같았다.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함께 수도 없이 비를 보고, 맞고,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쾌청한 가을이 오기 전에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에 그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내가 널 데리러 갈 때, 넌 한 번도 내게 웃어준 적이 없다’고. 예쁜 말도, 아픈 말도 장마처럼 했었다. 솔직하고 투박하고 직접적으로. 서슴없이. 그에겐 영락없이 그해 내렸던 비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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