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민지 Apr 07. 2020

코로나 시대의 일확립밤

어이 지나가는 양반, 바쁘지 않으면 이것 좀 보고 가오. 이게 그냥 립밤이 아니외다. 행복의 상징이라 이거요. 두고두고 생각날 봄의 조각이란 말이오. 아니 근데 이 립밤 얘기를 하려면 그전에 있던 오늘 하루 얘기를 해야 하는데.. 거 그러지 말고 그럼 잠깐 앉아보시오.

이 시대가 어느 시대요. 아세아, 구라파, 아메리카 할 것 없이 온 세상이 동시에 고장 나 멈춰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2020년. 어릴 땐 자동차가 날아다닐 줄 상상했던 해에 마스크가 금보다 귀해질 줄 알았겠소? 마음은 불안불안, 경제는 흔들흔들하던 날들 가운데 내 오늘은 좀 부자였지. 약국 앞에 엿가락처럼 휘휘 늘어선 줄을 기다려 산 마스크가 수중에 두 장이나 있었거든. 그걸 금보다 중한 귀인에게 몽땅 줘버렸는데, 빈손으로 돌아서는 발걸음이 사뿐하니 가벼웠소. 그 귀인이 내겐 하나 남은 손 소독제마저 양보할 수 있는 평생의 벗이었기 때문이오. 그걸 챙기느라 정신이 팔려, 이틀 째 아껴 쓰던 내 마스크는 온데간데없이 잊어버린 건 나중에나 깨달았지 뭐요. 기분이 좋아 그런 건 암시롱도 안 했지.

그리고 저어기 구라파 디저트와 아세안 플레이트를 파는 주막까지 걸어갔소. 이사님 으르신과 토끼 같은 팀원들을 만나 생산적인 회의와 비생산적인 농담을 섞어 가며 배를 채우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가더군. 그리고 밖에 나왔는데, 어느새 봄밤인 거요. 낮보다 따뜻한 밤이었고, 낮보다 가까워진 봄이었구려. 자네 같으면 슬슬 산책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 동할 수 있었겠소(타인과 2m 안전거리 준수). 걸을까 물은 건 나였소. 선뜻 따라나선 건 후배 한 명이었지. 그러다 대로변에서 반 접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발견한 건 다시 후배였소. 주으라고 한 건 나였지(지갑이나 돈다발이면 파출소를 갔겠지만 이름도 없는 지폐 한 장을 어쩌겠소). 로또를 살까 하다가 코로나 시대에는 신기루 같은 일확천금보다 작지만 안전하고 확실한 게 좋다고 생각했지. 우린 올리브영에 들어갔소. 마침 6천5백 원짜리 미제 립밤이 5천2백 원에 할인을 하고 있었다오. 마침 계시처럼 딱 2개가 남아있었지. 냉큼 집어 들었소. 잔금 4백 원을 치루 고선 후배랑 하나씩 나눠 갖고 그 자리에서 포장을 북북 뜯어 발라봤지. 메마른 입술이 금방 촉촉해지더이다.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건 바이러스뿐인 시대에, 미제 립밤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니 마치 해외라도 다녀온 것처럼 거짓말 같고 기뻤지.

그래서 행복의 상징이라오. 그래서 봄의 조각이란 말이오. 오렌지색 패키지의 무향 립밤을 돌려쓸 때마다 내 오늘의 봄밤이 생각날 것이오. 그래서 립밤을 샀더랬지. 자주 쓰는 물건이면 자주 보고 기억할 터이니. 줄 게 없던 날에 뭐든 주고 싶은 친구를 욕심 없이 사랑했던 날을. 기이한 해에 들어선 후 봄밤이 처음으로 따뜻했던 날을. 친구 같은 후배와 까르르 웃으며 걱정이나 고단함을 잠시 있을 수 있던 날을.

그래서 이 양반아.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내 오늘, 봄밤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단 거요. 얘기 다 끝났으니 이제 가던 길 가보시오. 조만간 또 얘기 들려줄 터이니 건강 조심하시구려.

작가의 이전글 봄의 아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