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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Oct 28. 2024

번아웃이 패션이라고?

치료받을 뿐만 아니라 이해받아야 하는 번아웃 증후군

임상심리 전문가로서 십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는 수많은 번아웃 증후군 환자들을 만나왔습니다. 최근 SNS와 여러 커뮤니티에서 "번아웃이 요즘 패션이야", "MZ세대의 새로운 핑곗거리네" 같은 발언들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을 보며, 더 이상 이러한 위험한 담론을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끄적여봅니다.


상담실에서 만나온 내담자들의 이야기는 결코 '패션'이나 '유행'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래 모든 상담사례는 내담자의 동의를 구하고 쓴 예시로, 비밀 보장을 위해 신상정보는 각색하였습니다)


지난주에 만난 한 스타트업 개발자는 1년간의 지속된 과로 끝에 심각한 불면증과 공황발작을 겪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연봉과 스톡옵션이라는 달콤한 미끼 뒤에 숨은 살인적인 업무 강도는 그의 몸과 마음을 서서히 갉아먹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극심한 두통과 구토감이 찾아왔고, 밤마다 업무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또 다른 내담자인 대형 로펌의 변호사는 만성적인 번아웃 상태를 방치한 끝에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때는 법조계의 엘리트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던 그가, 이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심장이 떨린다고 호소합니다. "더 이상 제가 제가 아닌 것 같아요"라는 그의 말은, 번아웃이 단순한 피로를 넘어 한 인간의 정체성마저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5살의 어린 교사였던 내담자는 극심한 번아웃으로 결국 사랑하던 교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 매일 밤늦게까지 수업 자료를 준비하고, 생활지도와 행정업무에 치여 살던 그는 어느 날 교실 앞에서 갑자기 숨을 쉴 수 없는 공황발작을 경험했습니다. "선생님은 힘들면 안 될 것 같았어요"라는 그의 말은, 우리 사회가 특정 직업에 강요하는 과도한 도덕적 부담과 책임감이 얼마나 큰 압박으로 작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과학적 연구 결과들은 번아웃의 심각성을 명확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만성적 번아웃 상태에서는 스트레스 조절과 감정 처리를 담당하는 뇌 영역의 기능적 연결성이 현저히 저하됩니다. 마치 자동차의 브레이크 시스템이 망가진 것과 같은 상태로, 스트레스에 대한 적절한 대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HPA) 축의 기능 장애입니다. 단순히 피곤한 상태가 아닌, 신체의 전반적인 호르몬 균형이 붕괴된 상태로 그 결과 면역력 저하, 심혈관 질환 위험 증가, 만성 수면 장애, 인지기능 저하 등 심각한 신체적 증상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번아웃이 패션이다"라는 위험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고 있다는 점이 사실 제일 우려됩니다. "요즘 다들 번아웃이라고 하니까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방치하다가 증상이 심각해진 후에야 상담실을 찾아오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초기에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졌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을 문제들이, 이러한 안일한 인식으로 인해 더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는 것을 임상 현장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더구나 번아웃을 개인의 '선택'이나 '유행'으로 치부하는 것은, 그 근본적 원인인 사회구조적 문제를 은폐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과도한 업무 강도, 불안정한 고용 환경, 극심한 경쟁 구도, 일과 삶의 경계가 무너진 근무 환경 등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에, 이를 단순히 '개인의 유행'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20-30대의 52%가 중등도 이상의 번아웃 증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취업 준비생의 67%가 번아웃 관련 증상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직장인의 43%는 일상적인 번아웃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로 인한 연간 경제적 손실은 약 26조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결코 '패션'이나 '유행'으로 치부할 수 없는 심각한 사회적 현실이라는 겁니다.


번아웃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개인, 조직, 사회 차원의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규칙적인 휴식과 충분한 수면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직적으로는 합리적인 업무량 조절, 충분한 휴가와 회복 시간 보장, 수평적이고 건강한 조직 문화 구축이 필요합니다. 사회적으로는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정신건강 관리에 대한 인식 개선, 치료와 상담에 대한 접근성 향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임상심리학자로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번아웃은 결코 개인의 나약함이나 의지 부족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한 개인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이며, WHO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명백한 건강 문제입니다. 이를 단순히 '패션'으로 치부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실질적인 해결책 모색을 방해하는 위험한 태도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번아웃을 겪는 이들을 향한 진정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입니다. 더 이상 이를 개인의 문제로 미루거나 세대 간 갈등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고통스러운 분들께, 한때 사랑했던 일이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분들께, 더 이상 자신이 자신 같지 않다고 느끼시는 분들께,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이 단순한 게으름이나 나약함의 결과일까 고민하시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지금 겪는 여러분의 고통은 결코 '패션'이 아닙니다. 당신의 힘겨움은 결코 '핑계'가 아닙니다. 당신의 어려움은 결코 '가벼운 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마주한 깊은 상처이며, 더 이상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감당해서는 안 되는 무게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향한 가장 용감한 사랑의 표현이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패배가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갈 준비가 된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곁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우리가 있습니다.


치유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여정의 끝에는 반드시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 긴 시간의 임상 경험을 통해 저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회복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으세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당신은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며, 당신의 행복과 건강을 위한 투자는 결코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온 마음 다해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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