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이 끊기도록 마시면 일어나는 일
2024년 한 해도 마무리 지어가는 시기입니다. 한 해의 고단함을 털어내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연말 모임이 줄을 잇는 시기죠. 그와 함께 술잔이 어우러지는 계절이 찾아온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중한 연말 추억들이 알코올의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면 어떨까요?
우리 뇌 속에는 양쪽으로 한 쌍의 특별한 구조물이 있습니다. 그 모양이 마치 바닷속 해마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해마'라는 기관입니다. 크기는 새끼손가락 첫마디 정도로 작지만, 이 작은 기관이 하는 일은 실로 놀랍습니다. 매 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을 기록하고, 분류하고, 저장하는 완벽한 시스템을 갖춘 이 기관은 인생의 가장 충실한 기록 보관소입니다.
해마는 뇌척수액이라는 투명한 액체 속에서 부드럽게 떠다니며 활동합니다. 마치 첨단 감시 시스템처럼 24시간 쉬지 않고 우리의 경험을 기록하죠. 친구와 나눈 대화, 맛있는 식사의 맛과 향, 특별한 순간의 감동까지... 인생의 모든 순간들이 이곳을 통해 기억으로 새겨집니다.
그런데 이 충실한 기억의 파수꾼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알코올에 대한 극도의 취약성입니다. 특히 연말연시처럼 잦은 술자리가 이어지는 시기에는 더욱 위험에 노출되기 쉽죠.
알코올이 체내에 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혈액 속의 알코올은 놀라운 속도로 뇌혈관장벽을 통과해 뇌척수액으로 스며듭니다. 마치 맑은 호수에 잉크가 퍼지듯, 알코올은 해마가 떠다니는 환경을 순식간에 오염시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취기와 함께 해마의 활동이 살짝 둔해집니다. 기억이 조금 흐릿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정도죠. 하지만 알코올의 농도가 높아질수록, 해마는 점점 더 깊은 혼돈 상태에 빠져듭니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0.15%를 넘어서면 해마는 마치 과부하가 걸린 컴퓨터처럼 새로운 정보의 저장을 완전히 중단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흔히 '블랙아웃' 또는 '필름이 끊겼다'라고 표현하는 현상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잦은 폭음으로 인한 블랙아웃은 해마의 신경세포들을 영구적으로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손상은 특히 연말연시 시즌에 더욱 위험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파티, 송년회, 신년회로 이어지는 연이은 술자리는 해마에게 충분한 회복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마치 계속된 침수로 건물의 기초가 무너지듯, 해마의 정교한 구조가 서서히 붕괴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손상이 축적되면 결국 알코올성 치매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죠. 과거의 기억은 간직하고 있지만, 새로운 경험을 기억 속에 새기지 못하는 이 상태는, 마치 매일 같은 날을 반복해서 사는 것과 같은 혼란스러운 삶을 초래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젊은 성인의 해마가 이러한 손상에 더욱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 난 아직 젊은데?‘ 가 안 통하는 겁니다. 20~30대의 과도한 음주는 뇌가 완전히 성숙하기도 전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과도한 음주가 40~50대에 이르러 심각한 인지기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도 있지요.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시간입니다. 지난 일 년의 추억을 되새기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중한 순간들이죠. 이런 귀중한 시간들이 알코올의 안갯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요?
올해는 건강하고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과도한 음주로 기억이 흐려진 연말이 아닌, 친구들과 나눈 진심 어린 대화, 가족들과 보낸 따뜻한 시간, 동료들과 나눈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연말을 만들어봅시다.
해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소중한 기억들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충실한 기억 수호자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 올린 선명한 기억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테니까요.
당신의 2024년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로 가득 차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해마가 건강하고 행복한 연말연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