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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울 Feb 16. 2021

나는 사실 부러웠지

갈망이 이끌어 가는 삶

바람이 꿈이라고 해놓고.

나는 바람같이 왔다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세상에 큰 미련도 없이 남기는 껍데기들도 많지 않게 소소하게 살다가 홀가분하게 가고 싶다고, 꼭 그것이 바람과 닮았다고 말해왔었다. 그래서 어느 것에도 열정을 불태워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과 교감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것 그 외에 나는 정말 부끄럽게도 그 무엇에 내 초의 심지를 꺼내어 들지 못하였다. 나를 태우고 싶은 바람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나는 열심히 살고 싶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을 태우고 가겠노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기도 한다. 나는 바람보다는 촛불처럼 아스라이 꺼져가더라도 세상을 밝게 해주고 싶다고, 나의 향기를 퍼뜨리고 싶다고 바람을 배신하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마더 테레사도 아닌데... 무엇을 불태우려나?


나를 말린 것은 누구일까?

 나의 마음속의 갈망을 보는 일이 참 어렵다. 그리고 내 눈에 촛불 같은 삶을 사는 저 단호하게 걸어가며 세상을 밝히는 그들이 참 부럽다. 나아가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차지하고 그 영역을 넓혀나가는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그들이 나는 부러워서 배가 아팠다. 어쩌면 나는 여태껏 바람이라는 이름 뒤로 나의 갈망을 숨기고 나마저도 속인 것일까?

 결혼을 해도 커리어를 잃지 않고 아이까지 양육하며 책도 써내는 그들이 부럽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갈길이 어딘지를 확실히 알고 저만치 걸어가는 그들도 부럽다. 이제 와서 보면 누군가가 나를 말려서, 그때는 상황이 그래서 라는 말은 진실로 핑계에 다름없다. 나를 막은 것은 나였지, 누구였겠는가? 결코 상황에 삶이 형성되지 않는다. 삶이 상황을 형성한다. 나는 이제야 그 진실을 알게 된 것 같다.


나를 아는 것, 그것의 출발

 20대 중반, 첫 입사한 직장에서 신입직원들을 대상으로 MBTI 검사를 했었다. 100명 남짓 되는 직원 중에 나와 같은 결과를 받아 든 사람은 딴 한 명이 더 있었다. 이상하게 모습도 나와 닮은 한 여성이었다. 우리는 뻘쭘히 앉아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한마디도 안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 결과는 INFP였다. 그런데 검사 결과 신입직원 80프로 이상이 나와 반대 성향인 ESTJ 었음을 알고 나는 경악했다. '아, 이래서 내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던 기억. 물론 세월을 살며 다소 바뀌기도 하고 네 가지 영역의 의미를 알면서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또 나를 설득하는 작업도 할 논리적 근거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제 너는 네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출발점은 이 곳이라고 생각한다. MBTI 검사처럼 명확하게 나의 기질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나의 생각이다. 나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나는 나에게 어떤 삶을 선물로 주고 싶은가? 




갈망이 삶을 그리기도 한다

 여전히 나는 바람에 대한 동경이 있다. 언젠가는 훌훌 나의 소유도 다 버리고 소유가 정신적 가치에는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멋진 척도 해보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이면에 나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는 아직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더 소유하고 더 유명해지고 더 부유해지고 더 멋지고 싶은,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욕구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그런 욕구를 인정해주지 않는 내가 더 잘못 된 것이다. 문제가 있는 쪽은 멋지게 사는 모습을 SNS에 남긴 그들이 아니라 그걸 부러워서 못본척하는 나의 태도이다. 비록 나의 가치와는 조금 다를 지라도, 실은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나도 '나'인 것이다. MBTI 검사로 받아든 결과지처럼 갈망과 성향을 네 개의 알파벳 조합으로 이해하기에 '나'는 퍽이나 복잡하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나는 겹쳐 살고 있다. 
'예전의 나', 그 위에 '오늘의 나', 그리고 '되고 싶은 나'로 겹쳐진다. 
결국 차곡차곡 겹쳐진 형태와 색채가 나의 모습을 갖추어간다. 


 내가 그리고 싶은 형태와 색체는 앞으로 계속 덧 입혀지겠지. 그리고 결국 아주 과거에 나는 그 흔적을 잃어갈지도 모르겠다. 삶이 그런지도 모르겠다. 무한히 변하고, 무수히 바스러지고, 그 와중에 어떤 잎은 피고, 어떤 잎은 지는지도 모르고. 정의를 할라치면 할 수 있지만, 그 정의의 도움없이도 삶은 시시각각으로 진행 중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나를 잘 모른다'에서 출발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려가는 형태는 알 수 있다. 그 형태와 색채를 정의하는 일에 머리를 쓰지 말자. 그저 내가 좋아하는 색감을 고르고, 내가 좋아하는 모양에 맞추어 줄 하나, 글하나, 그 행동과 결과가 '나'이다. 그저 묵묵히 나의 마음을 비우고 채우고, 내 삶을 주인인 듯, 손님인 듯 대하다 보면 나의 이야기도 편히 흘러나올 때가 있겠지. 

인생은 나그네라 했던가? 그러나 그 나그네도 열렬히 사랑도 하고 뼈아픈 이별도 했으리라, 명성을 떨쳐도 보고 그 명성을 잃어도 보았으리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누군가를 돕기도 했으리라. 그렇게 인생을 한 획 한 획 힘을 주고 빼기를 반복하며 성실히도 살았으리라. 


그러니 힘을 주고 싶을 때 힘을 주라. 부럽다면 부럽다고 말하라. 뛰고 싶을 때는 한껏 뛰어가라. 

후회 없이 살아라. 바람같이 살고 싶은데 후회가 마음 한가득 담겨있으면 바람이 될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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