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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h Aug 19. 2020

90년 대생의 은퇴 준비

파격이라면 파격이지만

회사가 재미있을 때도 있었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처음 해보는 일도 수월하게 배웠고, 미완결 상태를 못 참는 이상한 성격 탓에 하루 종일 할 일도 화장실을 참아가면서 오전 중에 해냈다. 거절을 못 해서 회식도 열심히 참석했고, 술도 센 편이라 주는 대로 곧잘 마셨다. 스물셋이라는 어린 나이에 취직했기 때문에 가끔 혼나도 덜 부끄러웠고 금방 털어냈다.

그래서인지 회사에서 평판도 괜찮았고, 입사 1~2년 만에 스카우트 제의도 몇 번 받았다. 

한동안은 그게 꽤나 보람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그 모든 게 너무 지긋지긋한 거다. 

출근 시각이 9시인데 8시 40분을 넘겨서 도착하면 눈치 주는 것도, 

본인은 전날 회삿돈으로 술 먹고 골골대면서 팀원한테는 이중 잣대 들이대는 팀장도, 

점심시간에 우르르 몰려가서 시답잖은 얘기나 하며 밥 먹는 것도, 

당시 사원급이었던 나에게 각종 보고를 떠넘기는 것도.

일요일 밤이면 회사가 가기 싫어서 눈물이 났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도 도졌다. 

(이건 아직까지도 못 고쳤다. 하루에 화장실 세 번 이상 간다.)

부인과 질병도 도져서 일하다가 응급실 실려가고 수술도 했다. 

(반드시 회사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회사 탓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일이 많으면 회사 일 다 내가 하는 것 같아서 눈물 나게 억울했고, 

일이 할만하면 일도 별로 없는데 하루 종일 회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게 분했다. 

기분도 오락가락해서 일 잘 하다가 갑자기 울고 싶어지면 화장실 가서 펑펑 울고 다시 일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나에게 '너는 조직 생활이 안 맞는 편 같다, 회사에서의 일도 스트레스지만 회사 가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도 된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정해진 길(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대기업 들어가서 적당히 여유 있게 사는 그런 길) 외에는 걸어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는 나는 아무런 결정을 못 했다. 

그냥 버티면서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나는 결혼도 하고 회사 내에서 팀도 옮겼다.

결혼하고 팀을 옮기는 게 내 상황을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을까, 어떻게 살아야 덜 불행할까. 

그리고 기나긴 고민 끝에 '은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계획을 세웠다.

내가 세운 은퇴 목표 및 계획은 다음과 같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너무 회사원 업무 메일처럼 쓰고 있는 느낌이 들지만 일단 계속 써보기로 한다.)

1. 2022년 2월, 직장 생활 8년 차에 은퇴한다. 

한국 나이 31세, 만 나이 29세인 시점이다. 

나도 안다. '은퇴'라는 단어를 쓰기에 너무 대책 없어 보이는 나이라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 대체할 말이 없으므로 일단 은퇴라고 한다.

'퇴사'는 이후에 또 다른 시작이 있을 수도 있는 열린 결말의 느낌이고, 

'은퇴'는 다시는 입사할 일 따위 없는 꽉 닫힌 결말 같은 느낌이다.

2. 내 인생에 이직은 없다.

많은 주변인들이 지금 회사가 힘들면 이직을 해보면 어떠냐는 권유를 해줬다.

내가 그동안 쌓은 경력은 사실 금융/통신/IT업계에서 상당히 잘 팔리는 편이므로 충분히 합리적인 대안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조직 생활을 얼마나 못 견디는지 안다. 

새로운 조직 생활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고? 소름 끼친다. 

그래서 퇴사는 하되 이직은 없다.

3. 은퇴 전까지 내 집 마련과 고정 수입원 확보를 끝낸다. 

나와 남편은 2017년 5월에 결혼해서 2018년 1월에 집을 샀다.

결혼을 하고 2017년 말부터 은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내 집 마련이라는 큰 짐을 남편에게만 지우고 은퇴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집을 알아보니 하필 이미 집값도 워낙 많이 올랐기에, 우리가 사고 나서 값이 떨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눈 딱 감고 아파트를 하나 샀다. 

전세도 끼고, 신용대출도 끼고, 회사 대출도 끼고 샀다.

잔금 치르고 나니까 통장에 10만 원도 안 남았었다. 요샛말로 영끌. 

대출은 1년 반 만에 다 갚았고, 전세 반환금은 모으고 있다. 

(세무조사도 받았는데, 이건 다음 기회에... 은퇴 준비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

2022년 2월이 되면 은퇴하고 이 집으로 이사할 계획이다.

일단 서울에 36평 내 집 마련을 끝내고 나니, 진짜로 은퇴를 꿈꿔봐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 집 마련도 끝냈겠다, 이제 고정 수입원 확보가 남았다.

내가 은퇴를 해도 남편이 고생해서 번 돈만으로 생활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직장 생활이 싫어 은퇴를 결심했지만,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100% 의존하고 싶지는 않다. 

남편은 나의 은퇴를 누구보다도 지지해 주는 사람이지만, 남편이라고 회사가 무작정 즐거워서 다니는 건 아님을 안다.

내가 번 돈으로 우리 세 식구(나, 남편, 강아지) 생활하고, 남편 월급은 그대로 저축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혹시나 남편의 벌이가 없어지더라도 지장 없도록 최소한의 수입을 확보해야 한다.

우리가 생활비를 많이 쓰는 편은 아니어서 내가 월 150만 원(재산세, 자동차보험료, 명절 용돈 등 연간비 포함 시 월 200만 원) 정도만 마련할 수 있으면 남편의 수입 없이도 생활할 수 있다. 

이제 은퇴 목표 시점까지 1년 반이 남았고, 남은 기간 동안 이 고정 수입원을 선별하고 검증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근로소득 외 수입원 확보의 일환으로 작년 말쯤 경기도에 부동산 투자를 시도하였고, 장부 상의 이익이기는 하지만 시세 차익을 상당히 거두었다.

그렇지만 시세 차익은 다달이 들어오는 고정 수입이 아니기도 하고 다주택자 부동산 규제도 상당해져서 지속성이 떨어지므로 고정 수입원으로는 탈락시켰다.

많이들 하는 월세 투자는 다달이 들어오는 수입이기는 하지만 공실 리스크도 있고 세입자와 속 시끄러울 일이 많아 보여 썩 당기지 않는다. (이쯤 되면 조직 생활만 안 맞는 게 아니라 그냥 사회 부적응자인지도)

아무튼 고정 수입원은 현재 딱! 정해진 것은 없지만 가능성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검증해보고 있다.

모든 투자처를 다 고려해보고 마지막까지 못 찾으면, 그때는 노동 소득이다. 학생 과외.

자, 여기서 개이득 포인트 몇 가지.

1. 시세가 떨어져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샀던 집은 2년 반 만에 5억이 올랐다. 

(물론 들어가서 살 집이니까 시세가 중요치는 않다. 집값이 오르면 재산세도 오른다. 다만 그때 안 샀다면 나는 내 집 마련을 못해 아마 은퇴도 못했을 것이다.)

2. 작년 말 처음으로 시도한 부동산 투자도 (어째서인지) 대박이 나서 현 기준 시세 차익이 1.5억이다. (지금 처분하고 양도소득세를 내면 반 토막인 게 함정이긴 하다.)

3. 2022년 이사할 '우리 집'에서 도보 20분 거리에 남편 회사가 입주한다.

나는 워낙 걱정이 많아서 회사 다니기가 죽기보다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퇴사를 저지르지는 못했다.

대신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계획한 약 5년간의 준비 기간 중 1년 반이 남았다.

내가 꿈꾸는 삶을 경제적 자유라고 해야 할지, 조기 은퇴(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라고 해야 할지, 자발적 백수라고 해야 할지, 그냥 제멋대로 사는 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 살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고, 앞서 말한 성과들은 이러한 준비와 인내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 고정 수입원만 탄탄하게 확보하면 된다. 

그 과정을 하나씩 남겨 보려고 한다. 

나이 서른에, 나와 남편 이름으로 된 '우리 집'에서, 남편을 걸어서 출퇴근시키고, 우리 강아지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주고, 싫은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도 내가 번 돈 당당하게 쓸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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