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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일상 사이, 그 모호함 견디기(+칠레 신분증)

서른 살에 떠난 칠레 워킹홀리데이4. 적응

by 칠레워홀러
깨달은 인간에게는 오직 한 가지 의무밖에는 어떤,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기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그리고 어디로 인도하든 간에 줄곧 자기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아가는 것.

- 헤르만 헤세 -



여행과 일상의 사이, 그 모호함 견디기


지난 주만 해도 여름이었는데 이젠 밤공기가 꽤 쌀쌀하다. 낯섦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이곳이 내 집이었던 마냥 편해진다. 문득 내가 왜 여기까지 왔나 신기하면서도, 십 년 뒤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추억될까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럭저럭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놀란다. 평일 낮은 묵고 있는 숙소에서 밥값 할 겸 일을 조금 돕고, 어학원 오후반을 듣고,
과제 좀 하다 살사를 추러 광장에 나가거나 혹은 근처 헬스장을 찾는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이곳이라 특별한 그런.
그냥저냥 행복하다,
그냥저냥.

한국에서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으니, 앞으로 뭐해먹고살까라는 불안감을 조금 억누르며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불행하려고 이 먼 곳까지 떠나온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 뚜렷한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 또한 모호하다. 그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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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2_141442.jpg 아르마스 광장의 체스 경기장(이라 하지만 그냥 우리나라 탑골공원쯤 되겠다). 할아버지는 세상 심각한 표정이다가도 나랑 눈이 마주치면 여유롭게 윙크까지 해 보였다. 사람 냄새가 났다


예상은 했건만 여행과 또 다른 일상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여행은 그저 단기간 동안 내가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행처럼 흘러들어온 이 곳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찬가지로 일상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꿈 좇아 온 지구 반대편은 또 다른 현실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누군가에겐 이 특별한 곳이 처절한 전쟁터겠지.
하지만 여유의 질은 다르다. 우리나라와는 매우.
떠남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돌아와 더 잘살기 위함임을 잊지 않고,
이들의 여유와 그 속에서의 행복을 배워가야지.
지금 행복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자.
다시는 못 올 순간들이니.








무시무시한 칠레 신분증 만들기


칠레 워홀러들 사이에선 칠레 신분증 신청 및 받기가 무시무시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비단 워홀러들 뿐만 아니라 칠레의 행정 체계를 경험해야 하는 모든 이들의 공포이지 않을까? 그래서 집-환전-유심(핸드폰) 다음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 바로 칠레 신분증 만들기이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답게 이 나라에 왔음을 법적으로 증명하기도 꽤나 멀어 보였다.


입국 후 반드시 1달 이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 수도 있다는 대사관 측의 말에

입국한 그 주 금요일 날 국제 경찰서를 먼저 찾아갔다.


*장소 : PDI(공식 명칭 Migraciones y Policía Internacional PDI) : San Francisco 253, Santiago, Región Metropolitana, 칠레

*준비물 : 여권, 800페소, 점심시간까지 대기할 수 있으니 간단한 음료수와 먹거리(대기줄 주위로 엠빠나다와 커피를 팔기도 한다. 믹스 커피 한 잔 1000페소), 읽을거리, 여유로운 마음가짐..

이민자들의 수가 많아 대기줄이 악명 높고,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발급은 꿈조차 꿀 수 없기에 가능한 한 빨리(입국 후 1달 이내에) 처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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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줄이 건물 한 바퀴를 돌아 옆 건물까지 뻗쳐 있다. 다양한 목적과 꿈을 가지고 칠레에 입국한 전 세계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난 아침 7시 20분에 도착해 서류 한 장을 받기 위해 정확히 7시간여를 기다렸다.

혼자 가는 것보다 일행을 구해 함께 처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급하게 화장실을 가거나, 너무 배고플 때 자리를 부탁할 수 있도록..(어떤 분들은 하루 안에 다 처리했다고 하는데, 3일 뒤에 다녀온 사람들도 7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복불복이다.)


다행히 난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엠빠나다(590페소) 2개와 코카콜라를 샀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다. 혹시나 해서 들고 간 스페인어 단어장 역시 유용했다. (이렇게 꼼짝 않고 서서 7시간 여를 기다린 적은 오랜만.. 이 아니라 생에 처음인 듯하다) 이렇게 힘들게 신청을 하고 나면 끝이냐고? 아니, 1달 뒤에 메일로 오는 확인서와 함께 시청으로 또다시 받으러 가야 한다. (그렇게 또 8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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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경찰서가 아닌 신분증을 수령하기 위해 갔던 시청 밖 상황이다. 별 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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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만에 겨우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면,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요즘은 인터넷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이 역시 불안한 시스템 덕에 많은 워홀러들이 헤매고 있다고 한다. 부디 하루빨리 시스템이 안정기로 들어서서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image_4779753111491999491691.jpg 총 20시간을 줄 선 끝에 받은 칠레 외국인 등록증. 이제 클럽 갈 때 여권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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