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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레워홀러 Feb 12. 2020

여행과 일상 사이, 그 모호함 견디기(+칠레 신분증)

서른 살에 떠난 칠레 워킹홀리데이4. 적응

깨달은 인간에게는 오직 한 가지 의무밖에는 어떤, 그 어떤 의무도 없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자기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그리고 어디로 인도하든 간에 줄곧 자기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아가는 것.

- 헤르만 헤세 -



여행과 일상의 사이, 그 모호함 견디기


지난 주만 해도 여름이었는데 이젠 밤공기가 꽤 쌀쌀하다. 낯섦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고 이곳이 내 집이었던 마냥 편해진다. 문득 내가 왜 여기까지 왔나 신기하면서도, 십 년 뒤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추억될까 생각하니 웃음만 나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럭저럭 별 일 없이 잘 지내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놀란다. 평일 낮은 묵고 있는 숙소에서 밥값 할 겸 일을 조금 돕고, 어학원 오후반을 듣고,
과제 좀 하다 살사를 추러 광장에 나가거나 혹은 근처 헬스장을 찾는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이곳이라 특별한 그런.
그냥저냥 행복하다,
그냥저냥. 

한국에서 나름 치열하게 살아왔으니, 앞으로 뭐해먹고살까라는 불안감을 조금 억누르며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불행하려고 이 먼 곳까지 떠나온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 뚜렷한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 또한 모호하다. 그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정도.


아르마스 광장의 체스 경기장(이라 하지만 그냥 우리나라 탑골공원쯤 되겠다). 할아버지는 세상 심각한 표정이다가도 나랑 눈이 마주치면 여유롭게 윙크까지 해 보였다. 사람 냄새가 났다


예상은 했건만 여행과 또 다른 일상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여행은 그저 단기간 동안 내가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행처럼 흘러들어온 이 곳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찬가지로 일상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꿈 좇아 온 지구 반대편은 또 다른 현실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누군가에겐 이 특별한 곳이 처절한 전쟁터겠지.
하지만 여유의 질은 다르다. 우리나라와는 매우.
떠남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돌아와 더 잘살기 위함임을 잊지 않고,
이들의 여유와 그 속에서의 행복을 배워가야지.
지금 행복할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자.
다시는 못 올 순간들이니.








무시무시한 칠레 신분증 만들기


칠레 워홀러들 사이에선 칠레 신분증 신청 및 받기가 무시무시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비단 워홀러들 뿐만 아니라 칠레의 행정 체계를 경험해야 하는 모든 이들의 공포이지 않을까? 그래서 -환전-유심(핸드폰다음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 바로 칠레 신분증 만들기이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답게 이 나라에 왔음을 법적으로 증명하기도 꽤나 멀어 보였다.


입국 후 반드시 1달 이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 수도 있다는 대사관 측의 말에

입국한 그 주 금요일 날 국제 경찰서를 먼저 찾아갔다.


*장소 : PDI(공식 명칭 Migraciones y Policía Internacional PDI) : San Francisco 253, Santiago, Región Metropolitana, 칠레

*준비물 : 여권, 800페소, 점심시간까지 대기할 수 있으니 간단한 음료수와 먹거리(대기줄 주위로 엠빠나다와 커피를 팔기도 한다. 믹스 커피 한 잔 1000페소), 읽을거리, 여유로운 마음가짐..

이민자들의 수가 많아 대기줄이 악명 높고,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발급은 꿈조차 꿀 수 없기에 가능한 한 빨리(입국 후 1달 이내에) 처리해야 한다.


 


이런 줄이 건물 한 바퀴를 돌아 옆 건물까지 뻗쳐 있다. 다양한 목적과 꿈을 가지고 칠레에 입국한 전 세계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난 아침 7시 20분에 도착해 서류 한 장을 받기 위해 정확히 7시간여를 기다렸다.

혼자 가는 것보다 일행을 구해 함께 처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급하게 화장실을 가거나, 너무 배고플 때 자리를 부탁할 수 있도록..(어떤 분들은 하루 안에 다 처리했다고 하는데, 3일 뒤에 다녀온 사람들도 7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야말로 복불복이다.)


다행히 난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엠빠나다(590페소) 2개와 코카콜라를 샀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다. 혹시나 해서 들고 간 스페인어 단어장 역시 유용했다. (이렇게 꼼짝 않고 서서 7시간 여를 기다린 적은 오랜만.. 이 아니라 생에 처음인 듯하다) 이렇게 힘들게 신청을 하고 나면 끝이냐고? 아니, 1달 뒤에 메일로 오는 확인서와 함께 시청으로 또다시 받으러 가야 한다. (그렇게 또 8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이 곳은 경찰서가 아닌 신분증을 수령하기 위해 갔던 시청 밖 상황이다. 별 반 다르지 않다.



몇 시간만에 겨우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면,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요즘은 인터넷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이 역시 불안한 시스템 덕에 많은 워홀러들이 헤매고 있다고 한다. 부디 하루빨리 시스템이 안정기로 들어서서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총 20시간을 줄 선 끝에 받은 칠레 외국인  등록증. 이제 클럽 갈 때 여권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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