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협아 Jun 09. 2019

필요한 것은 어쩌면 언어 번역기가 아니라 마음 번역기

그들의 말을 이해했다면, 이제는 그들의 진짜 속마음을 이해해 볼 차례!

역시 말이라는 놈은 어렵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어렵지만 언어 자체의 속뜻을 꿰뚫는 일 또한 일상 속의 계속되는 숙제다. 이 부분은 영어뿐 아니라 아마 그 어떤 외국어를 쓰든 혹은 (심지어) 모국어를 쓰는 상황에서도 어렵지 않게 겪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지금 내가 지내고 외국의 어느 곳이 속마음 안 드러내기로 유명한 곳이라면 더더욱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저 사람이 말하는 것 자체를 뇌에서 통역해내느라 한 번 바쁘고, 그다음에는 이 사람 말의 진짜 뜻을 한 번 더 걸러내느라 두 번 바쁘다.



image from bbcamerica.com

얼마 전에 웹 서핑하다가 발견한 표다.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 정확함과 기발함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그저 웃을 수 만은 없는 게 저게 정말로 진짜다......

그냥 유머로 생각하고 보면 아, 이 나라는 이렇구나 하고 웃으며 넘어가면 되지만, 저 해석의 승률에 따라 내 밥그릇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생각하면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다.


이곳 런던에 넘어와서 내가 겪은 에피소드부터 살짝 나열을 해 보자면..


1) 크리스마스 때 갈 곳 없으면 우리집에 와! 우리 가족들이랑 크리스마스 보내자. 너 혼자 절대 크리스마스 보내지 마! = 절대 우리집에 오지 마.


2) 지난 주가 니 생일이었다고? 오마이 고쉬! 다음 주 화요일에 시간 돼? 우리 스시 파티 하자! 시간 되는지 체크해 보고 알려 줘! = 생일 축하해. 근데 난 다음 주 화요일에 바빠.


3) 네가 제출한 제안서 잘 읽어 봤어. 그것 참 아주 흥미로운 접근이야. = 러비쉬.


4) 그걸 진행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 아, 혹시 네가 그걸 한 번 해 볼 용기가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 절대 하지 마.



그렇다.

영국.

찰떡을 절대 찰떡으로 믿으면 안 되는 곳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며 찰떡같이 말해도 더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곳이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들을 꼽으라면 이곳 영국 사람들은 절대 빠지지 않고 그 도마에 위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모습은 그들이 쓰는 말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오죽하면 영국인들이 쓴 Sorry나 Excuse me의 과도한 사용을 자조적으로 쓴 책들도 출판되어 인기를 얻고 있을까.



재미있는 건 사실 온도차만 좀 있을 뿐 어느 나라나 저런 indirect 한 부분은 있을 텐데 유난히 유럽 내에서는 영국, 아시아 내에서는 일본 정도가 이런 간접적인 대화 방식으로 핀잔 혹은 웃음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어떤 사람은 섬나라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묶어서 (조금은 극적으로) 표현도 한다는 말이지. 물론 지내다 보면 이 두 나라가 정말 속내를 안 드러내는 걸로 유명한 것도 알겠고, 그런 정서와 생활 방식이 언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도 알겠는데,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이게 정말 영국(혹은 일본)의 특징으로만 잡고 바라볼 부분인가?


질문이 여기까지 오니 영어가 아닌 모국어인 한국어로 대화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한국어로 대화할 때 과연 나는 얼마나 내 의중을 다 드러내는가?

한국어로 대화할 때 친구가 있는 속내 없는 속내 다 드러내는 걸 곱게만 바라봤던가?

한국어로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혹은 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 돌려돌려 말한 적은 없었나?

그렇게 돌려돌려 말한 걸 깨닫지 못하는 상대방을 봤을 때 속이 터졌던 적은 없었나?


이곳 영국의 문화나 영국 사람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해 봤을 리도 없고 여기 사는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 다 만나 봤을 리도 만무하기에 감히 여기 사람들은 이래! 저래! 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평소에 보고 들은 소문(?)이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좌지우지하듯이 이곳 사람들에게서 저런 (위의 표에 나오는 대화 내용) 부분을 발견하면 "아, 정말 이곳 사람들은 이렇구나!" 라고 그 인상을 그대로 굳혀 버린다. 그리고 다음 사람을 만날 때에도 '아, 어차피 너도 이곳 사람이니 이런 스타일이겠지?' 라고 마음속에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보고 있겠지. 그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영국 사람들에 대한 의견을 굳혀갈 테고, 나중에 돌아가서는


"영국 사람들은 정말 저래. 말을 절대 다이렉트하게 안 해. 이해하려면 돌려서 생각해야 해. 힘들어."


라고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인연을 저렇게 하나로 잡아 회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이거 정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지.)

영국 사람들이 저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그들이 말하는 것도 저런 부분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대화의 흐름이 좀 더 유하게 흘러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이 땅의 모든 영국 사람을 만나 본 것도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과연 이 사람들이 24시간 내내 저렇게 둘러말하기만 할까? 그들도 상황이나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 완급 조절을 할테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솔직하고, 똑 부러지게 분노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지.


사람의 특성을 국적만으로 판단하는 건 정말 양날의 검과 같다. 선입견을 가지기에 가장 좋은 무모한 선택이란 것도 알지만, 동시에 가장 큰 단서가 되는 것도 바로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느냐이기에.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아직 이곳에서 지낸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뭐 총합을 따지자면 3년은 될 것 같다.) 영국 런던은 이런 곳이고 이곳 사람들은 이러이러해 라고 결론 내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마음의 비밀번호와도 같은 저런 언어 습관을 조금씩 이해하고, 그에 맞춰 대화에 따라가다 보니 어느샌가 나도 같은 파도에 몸을 실은 것 같은 기분은 든다. (최소한 지도 교수님이 이건 절대 하지 말라고 둘러둘러 경고하는 걸 알아채는 센스는 생겼단 말이지.) 또 바쁜 아침 출근길 튜브에서 부딪치거나 조금만 가까워져도 sorry와 alright을 무한반복 함으로써 이곳에 조금은 녹아들고 있는 건가 하며 변화한 내 모습을 보는 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그렇다. 그렇게 이곳에서 하루하루 신기해하며 지내고 있다.



p.s. 사실 한국에 한 번 잠깐 들어갔을 때 친구들에게 (한국어로) 말하는 스타일이 조금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말투나 억양이 외쿡인 같아졌다는 뜻 일리는 없고, 뭔가 싶어 들어 봤더니 예전에는 돌려 말하는 센스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솔직함의 대명사였는데 언제부턴가가 아주 능글맞아졌다고 한다. 좋게 말하면 언어 선택에 있어 상대방을 배려하는 매너가 생겼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아주 구렁이마냥 속마음을 안 드러내려고 용을 쓰는 것 같다고 한다. 이 친구들도 영어나 외국 생활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라 나의 이 영국 생활이 이 변화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직접 지적까지 해 주었다.


아, 이게 이렇게 또 영향을 받는구나. 내가 쓰는 한국어가 내 영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건 평생에 걸쳐 뼈저리게 느끼고는 있었지만, 이곳에서 쓰는 내 영어가 결국 내 모국어를 이렇게 건드리기도 하는구나.

결국 내 언어, 내 말, 더 나아가서는 나를 이렇게 변화시키는구나.


역시 말이라는 놈은 어렵기도 하지만, 아주 재미있는 녀석이다.

















작가의 이전글 영국 영어 vs미국 영어 : 방황하는 어느 한국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