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림과 울림>을 읽고
‘원자론의 입장에서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이다. 원자는 불멸하니까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죽음을 원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새로운 시선이었다. 이 얘기대로면 죽음은 원자들이 다시 흩어지는 행위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리고 흩어진 원자들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 어쩌면 원자가 흩어지도록 하는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래의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원자가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살다 보면 남과 다툴 일이 있다. 여기에는 자기가 옳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이 깔린 경우가 많다. 지구에서 보는 우주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달에서 본 우주도 옳다.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달 위에 정지해 있는지도 모른다. 다투기 전, 달에 한번 갔다 오는 것은 어떨까.’
모두 다 옳다. 각각의 사람은 달의 위치, 지구의 위치, 또 다른 별의 위치에 서있다. 보이는 게 다르니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옳고 그름이 없다. 달에서 본 우주와 지구에서 본 우주가 옳고 그름이 없듯이. 내가 보이는 것과 남이 보이는 것이 다르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인생 살기 편해지지 않을까.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달에서 본 우주와 지구에서 본 우주의 모습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다.
‘세상은 텅 빈 진공과 그 속을 떠도는 원자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관습, 즉 인간 주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믿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삼성 전자’는 가상이다. 왜냐, 삼성에서 일하는 직원 하나가 삼성 전자도 아니고, 삼성 회사 건물이 삼성 전자도 아니다. 삼성 회장이 삼성 전자도 아니며 삼성 핸드폰이 삼성 전자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 구성된 직원이 모두 바뀌어도 삼성 전자는 존재한다. 삼성 전자는 우리가 만들어 낸 가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화폐, 무역, 사회제도, 자유, 평등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상을 믿는다. 예전에 세상 모든 것은 상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는 무슨 이상한 소린가 하고 넘어갔는데 이제야 이해가 됐다. 가상이라 해서 나쁜 걸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상을 믿는 힘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모든 게 가상이라 해도 우리는 모든 것을 실재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실재한다 생각할 수 있다. 길 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삼성 전자가 있냐고 묻는다면 있다고 답할 거니까.
어떤 영상에서 ‘나’도 가상이라고 한다. 삼성 전자의 직원이 바뀌어도 삼성 전자가 존재하는 것과 똑같이 ‘나’도 시간이 지나면 세포가 모두 교체된다. 그런데 ‘나’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런 점을 가상이라고 한다. 비록 남이 있을 때만 나를 설명하는 게 가능하더라도, 남이 붙여준 이름으로 살아가도, 내가 가상이라 해도 옆 친구에게 ‘민주’는 있냐?라고 묻는다면 저게 미쳤냐는 눈빛과 함께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가상을 만들어내고, 가상을 동경하고, 가상에 대해 분노하며 가상으로 살아간다. 뭐 어쩌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고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이 문장을 읽고 싶어서 책을 빌린 건지도 모르겠을 만큼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죽음, 삶, 우주, 인간... 가끔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나까지도 덧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쩌면 덧없다고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크기로만 비교했을 때 우주에서 인간은 먼지 한톨보다 더 작고 작은 존재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살아내는 존재들이 인간임을 떠올려본다.
- 2020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