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
큰일이다, 1년치 행복을 끌어다 썼나봐
한국으로 돌아온지 일주일이 넘어가는데 아직도 내일 아침 6시에 비몽사몽 일어나 선크림을 바른채 보드를 툭툭이에 싣고 서핑을 가야할 것만 같다. 손이 시려운 차가운 날씨 속에 살아가다보니 더욱이 스리랑카의 강렬한 햇빛이 그리워진다. 차라리 할 것들이 넘쳐나 부지런히 움직여야한다면 좋으련만 특별히 바쁜 일이 있지도 않아서 무료함과 허전함이 배로 다가왔다. 스리랑카에 있는 동안 충분히 즐기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더 길게 있다 올 걸. 다시 가고 싶어 미치겠다.
하루 두 번씩 바다에 나가도 질리지 않던, 오히려 타면 탈수록 재밌어지는 서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제일 아쉽다. 날은 춥고, 나는 면허도 차도 없고, 돈도 없고, 바다는 저 멀리 있고. 흠뻑 빠졌을 때 억지로 끌려나온 느낌이라 생각이 많이 난다.
짧은 시간에 정이 들었던 친구들도, 눈만 마주쳐도 씨익 웃어보이던 친절한 사람들도,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망고 주스도, 매번 두그릇씩 담아 먹었던 조식도, 세상 순한 강아지들도 여기에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하루에도 몇 번씩 스리랑카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보고 또 보는 것이다. 스페셜 코코넛 진짜 맛있었는데, 이날 노을이 정말 예뻤지 떠올리면서. 아쉽고, 그립고 약간은 울적한 마음도 들지만 스리랑카에서의 생활이 그만큼 즐거웠다는 걸 증명해주는 것 같다. 행복하게 잘 지내다 온 걸 넘어 도파민 폭탄을 맞고 왔구나 싶어서. 그때의 감정과 기억들을 녹슬지 않게 고스란히 간직하며 다시 돌아온 내 일상을 살아가야지.
스리랑카가 내게 남긴 것들
17일이라는 시간만 놓고 보면 아주 긴 기간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이 아닌 스리랑카에서 17일은 다를 수 있다. 모든 날을 밀도있게 꽈악 채워서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는 되게 긴데 일주일은 후딱 가는 기분이랄까. 달력에게 속는 느낌이었다. 미지의 나라였던, 모든 것이 새로웠던 스리랑카. 그곳에서 내가 얻어 온 것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것들이다.
첫 날 툭툭이를 타고 바다로 가는데 신호도 없고, 부딪힐듯 안 부딪힐듯 아슬아슬하게 잘만 다니는 차들에 당황했던 건 사실이다. 속도가 느린 오토바이를 지나칠 때에는 경적 한번 울려주고 앞질러 간다. 경적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는데 나중엔 그 소리가 거슬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경적을 울린다는 것은 너 운전 똑바로 안 하냐의 뜻이라면, 여기서는 나 갈거니까 비켜 혹은 조심해라고 알리는 의미에 가까운 것 같았다. 똑같은 경적 소리가 다르게 느껴져 신기했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문화를 경험했다. 스리랑카의 모든 지역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더라도 눈만 살짝 마주치면 인사를 한다. 싱긋 웃거나, 고개를 까딱 움직이거나. ‘Hello’ ‘How are you’ 같은 단어로 시작해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이렇게 많이 인사를 해본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나한테 인사를 한 게 맞나 헷갈리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는데 그 분위기에 녹아들고 나니 좋은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마주쳤던 사람들과 내적 친밀감이 쌓여서 오늘은 어디 있나 괜히 한번 살펴보기도 하고, 누구나 밝은 얼굴을 보여주니까 환대 받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받은만큼 나도 환히 웃었다. 나이와 성별, 인종에 상관하지 않고 인사를 한다는 게 사소하게 보일 수 있어도 쌓이고 쌓이니까 결코 작은 요소가 아니었다.
스리랑카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들 덕분에 여행이 한층 풍성해졌다. 서핑을 하기 전에 해변에서 몸을 풀고 있으면 저 앞에서 손을 흔들어주고, 하루도 빠짐없이 오늘 서핑은 어땠냐며 물어봐준 뒤에는 항상 내일 또 보자는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서로의 말을 완벽히 알아 듣지는 못해도 표정이나 말투로 소통이 되고 장난을 칠만큼 친해질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특별한 순간들이었다. 잠시 있다가 떠날 외국인라는 걸 뻔히 알텐데 진심으로 다시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느껴져 고마웠다. 인스타그램에 종종 올라오는 소식을 보고, 가끔 걸려오는 영상 통화를 받으면서 반갑게 하이파이브를 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스리랑카인들의 친절함을 한껏 느끼고 나니 내 인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 스리랑카 사람들이 많이 타있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면 길거리에서 백인을 볼 때와 피부가 까만 사람들을 볼 때의 느낌은 달랐다. 낯설고 약간은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비행기 양 옆에 스리랑카인들이 있으니 그저 반가웠다.
같이 서핑을 하고, 밥을 먹고, 놀러다녔던 한국 분들과의 시간도 소중했다. 서핑이라는 공통 분모가 아니었다면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나보다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아직 스리랑카에 남아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라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다. 머지않아 한국에서 또 보기를.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서핑을 고작 세 번 해보고, 네 번째 서핑을 스리랑카로 갈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안 갔으면 어쩔 뻔 했나. 날씨도 화창하고, 파도도 친절하고,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도 좋고 어느 하나 부족하거나 불만이었던 게 없었다. 행복했던 순간들을 잔뜩 선물해줬던 스리랑카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