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없다는 것의 기쁨.
망망대해에서 운전키를 잡고 항해하며, 빈 방에 혼자 갇혀 듣는 노래, 그리는 그림, 일기장에 연필로 쓰는 글. 젊고 어렸을 때의 취향은 흐려지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갈 곳을 정하거나 같이 살아갈 사람을 선택할 때에도. 말투나 웃거나 우는 타이밍에도 묻어 있다. 유전자에 우연을 섞어 무의식 결에 고르는 색깔을 더 해, 자신이 고른 모든 것.
나는 거칠고 흐릿하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사랑한다. 내용물보다 이미지와 스타일에 막연히 집착한다. 스무 살 겨울 처음으로 혼자서 해외여행을 떠났다. 파리였다. 준비물로 가져간 두 권의 책은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동네의 작은 서점에서 산 사강의 책이었다. 파리에서 나는 사강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그 책을 고르게 된 건 출판사, 책 디자인, 첫 페이지의 몇 줄 때문이었다. 틀림없이, 더 볼 것도 없이 그 책이었다(펼쳐보고 싶었지만 도착해서 읽으려 참았다). 그리고 파리에 머무르는 한 달 동안 줄곧 책을 가지고 다니며 아껴 읽었다.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가방에 옮겨 담고 카페에서 꺼내 읽으며. 사랑에 빠져버린 데다 끝을 알고 있었으므로 마지막 페이지가 가까워올수록 두려웠다. 처음 읽는 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되도록 천천히 공을 들여 읽어나가려 해도 멈추지 않는 시간보다 잘 읽혔다. 살며 시절과 정신에 일치하는 옷을 가져본 적이 있다. 몇 곡 안 되는 음악, 몇 편의 영화, 몇 개의 그림을 마음 깊이 사랑했다 해도 그와 같이 강렬하고 완벽한 느낌은 아니었다. 단락 지어지는 순간을 지배하는 게 아닌 전체적인 관통이었다. 그 후로 사강이 차지한 자리에는 다양한 시대에 제각기 태어난 어떤 스타일의 천재도 들어오지 못했다. 나는 파리를 그저 정처 없이 골목으로 아무렇게나 걸으며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우연히 닫힌 가게의 창 안으로, 어두운 실내의 한 쪽 벽 가득 인물 사진이 담긴 액자가 빼곡하게 걸려 있는 가운데 곧장 사강의 얼굴이 보였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고요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조금 전 내린 비로 길과 공기는 축축했다. 모든 우연 때문에, 실체 없는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더라도 나는 모든 걸 계시로 받아들였다. 여행이 끝난 후 나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는 문예창작학과로 편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 파리에서 살 수 없으니 서울로 올라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리라고도. 나는 부모님의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직도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그녀와 닮은 구석이 있는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삶에는 다르게 적용됐다. 사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가진 타고난 부 혹은 미모, 대단히 좋은 운이나 재능 같은 건 나에게 없었다. 나는 어떤 인물을 연기하고 있었다. 진짜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갈구하면서 내면에는 재료가 부족해 그 만으로는 아직 무엇도 만들어낼 수 없어서였다. 때마다 달랐으나 머릿속에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러 감상적인 인물을 띄워놓고는 그 이미지에 젖어 되는대로 연기했다(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보다는 책의 주인공이나 그걸 쓴 작가를 연기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때로 그건 남자나 여자였고, 어린애나 노인이었다. 공통적으로 제멋대로이며 고집이 셌다.
나는 사강의 관대함과 충동, 균형 감각과 판단력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하는 게 무색하게 나는 무엇도 찾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결혼 생활이나 집필 방식이 어떠했는지에 관해. 그녀가 글에서 스스로 나에게 쥐어주는 게 아니라면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따로 찾아보는 건 하지 않았다. 나의 애정은 추상적인 느낌으로 내면에 존재할 뿐, 탐구와는 무관했다. 그녀가 글로서 직접 손에 쥐어 주는 게 아니면 자극적인 내용들은 기분 좋은 안개처럼 떠 있다 사라졌다. 나는 호기심도 그다지 없는데다 샅샅이 파헤치는 건 직관적인 정신 유지에 좋지 않다고 여겼다. 그녀의 대담함과 정직함 그리고 모순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자유로운 지성은 일상에 적용할 수 있었으며 상상력을 자극한 것만으로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나의 바탕에 그녀의 스타일을 적용해 탄생한 것에 나는 소박하게도 만족했다. 그녀의 글을 읽기 전의 내 모습과 생활은 전과 달랐다. 그건 이전의 나와 같지도, 또 그녀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 스타일의 허영과 지성에 탄복하며 번역된 글을 읽었고, 그건 사람들 속에서 자유로운 우정을 맺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절대 철학이라 부르지 않을 듯싶은 그녀의 철학에 의거해 나는 귀와 시야와 감각을 다른 방식으로 열었다. 그녀를 입고 다른 눈을 떴다. 그녀가 나의 기준이었으므로 나는 거기에 의지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끊기도 했다. 감정을 삼키거나 뱉어버리거나 유지했다. 나는 그녀와 같이 삶에 도취했고 흥분했으며 희열을 느꼈다. 그녀는 닫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그녀와는 전혀 다르더라도 그녀의 말에 따라,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있었다. 그녀가 내 안에 새겨놓은 기준과 유전자 지도에 그려져 있는 길은 뒤섞였다. 어느 순간 나는 어느 인물을 뒤집어쓰고 연기하는 건 그만두었다. 자유는 내 세계를 온통 두르고 있는 벽지에 피어있는 자잘한 문양 같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아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시대와 동떨어진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시대를 상징하는 매혹적인 악동 같았던 것과는 영 다르게. 랭보와 피츠제럴드, 장 콕토와 보리스 비앙. 나는 그녀에게서 운전하는 방식을 배워 스스로 운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만하고 자유로운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 나는 그녀라는 캐릭터에서 벗어나 그제야 자유롭게 항해했다. 단락은 헤르만 헤세나 헤밍웨이, 루이제 린저, 폭풍의 언덕, 잭 케루악과 다자이 오사무, 보부아르와 전혜린, 실비아 플라스로 채워졌다. 다른 인물을 덧입는 방식을, 입었을 때의 편리함을 이용해 각기 다른 순간을 맛보다 보니 덧입지 않으면 스스로가 밋밋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솔직해지기만 한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그 안에 있는 가능성이 무엇과 닮아 있더라도 고유함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쁘게도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으며 방향이 시시각각 변할 수 있어 한 순간도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 운전대에 손을 얹고 있다는 사실 전체를 망각했다. 가진 것과 쌓인 것 사이에서 길을 잃을 리 없다 방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지표나 다름없는 그녀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고 느낀 건 그녀가 사라지고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빈 방은 냉기가 감돌았으며 축축했다. 혼자만 있는 나의 세계는 음울했다. 나만 있는 세계가 부담스럽게 황량하다는 사실에, 아무 리듬도 흘러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으나 외로움은 처음으로 나를 집어삼켰으며 나는 불안에 덜덜 떨었다. 직관은 두려움에 닳아 뭉툭해졌다. 닫힌 가능성에서는 끝 모를 낯섦, 근거 모를 암담함이 느껴졌다. 목적 없는 젊음이 지나갔다. 그렇게 되는 동안, 또 그러는 내내 나는 닫힌 시야로 보이는 모든 것을 판가름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가슴이 답답했으며 그럴수록 더 박차를 가해 그렇게 했다.
사강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단순하게 생각하라고 했으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걸 허락 받지 못한 사람처럼. 나는 꼼짝없이 멈춰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자 시간이 멈췄다. 거울 속에는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어딘가 비굴해 보이는 얼굴이 있었다. 나는 매일같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 한 알 수 없는 단서들을 차례로 물고 왔다. 마치 충실한 개처럼. 그러나 그녀는 단순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유머가 없는 것은 결점이라고 여겼다. “상상력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단언했다. 실용적이지만 재미없는 토대 위에 집이 지어지는 것을 유일하게 막는 것이 상상력이라고. 거의 신경질을 내면서 가진 사람도 가끔 있지만 절대 강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또 타고난 미모와 상관없이 상상력이 집에 한 번도 들르지 않은 사람을 볼 때면 얼굴이 잘려 나간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품었던 추상적인 느낌들은 정리되지 못한 채 뒤엉켜 아무렇게나 보관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주머니를 뒤져 보니 의외로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제정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처럼 타고난 자질과 좋은 운이 있는 거라 믿었으나 취향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내 정신과 행운이 빛을 발하지 못하자 세상은 추하게 보였다. 그 때 느낀 증상들은 별로 적고 싶지 않다. 자신에 관해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전부이다.
그러다 비장했던 초등학교 입학식 날의 기분이, 비탄에 잠긴 채 덤덤한 척 연기하던 소풍날의 마음이,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에서 불현 듯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몸을 움직이자마자 엄마의 맨얼굴과 엄마가 입고 있는 결이 좋은 분홍색 스웨터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꼈던 경탄이 나의 세상과 이어져 있었으며 앞으로도 이어져 내려갈 거라는 데 생각과 닿았다. 온갖 낯선 것 사이에서 유일하게 낯설지 않은 엄마의 체취를 눈물 나게 사랑했던 것도.
어리고 젊었던 때 나에게 엄마는 “제발 망상이나 몽상에서 좀 빠져 나와!”라고 부탁했다. 내가 사랑한 친구는 당연히 결혼을 할 생각이 있다는 나에게 “너는 결혼 해버리면 두 번은 이혼 할 거야. 남에게 피해주지 말고 그런 생각은 접어.”그렇게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은 “너는 커서 나처럼 될 거야.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거고, 담배를 피우게 될 거야.”라고 예언했다. 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된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을, 생각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나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누웠다. 개는 내 뒤를 따라왔다. 밋밋하고 너른 하늘에서는 비행기 소리가 따분하게 들려왔다. 정오였다. 하얀 실내화는 추위에 딱딱하게 굳어 나무 복도에 닿을 때 마음에 드는 소리를 냈다. 육교 위에서는 간혹 지나가는 차가 보였다. 아파트와 작은 밭 사이로 난 좁은 흙길인 지름길로 지나갈 때도, 엄마를 기다리며 창 앞에 누워 밋밋하고 너른 하늘을 바라보는 지루한 시간에도 비행기 소리가, 그 따분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의 빛이 어렴풋이 비추는 집안 공기는 훈훈했으며 더없이 아늑했다.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는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잠시 숨죽이고 티브이 소리며 부엌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집안 공기에 휘감긴 채 못내 서럽고 아쉬운 마음으로 집안을 바라보다 어쩔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밖으로 나가자 차고 신선한 공기가 맡아졌고, 짙은 안개로 온 세상이 가려져 있었다. 나는 안개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이 주는 모호한 예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안개가 피어 있는 가을 아침 시간에, 또는 비 내리기 전의 고요하게 가라앉은 어두침침한 집안에서 억지로 바깥으로 나갈 의무가 없는 한량이 되는 건 나의 오랜 꿈이었다. 먼 곳을 향한 갈망 아래에도 존재했던. 나는 그 뒤에 얻은, 나만 있는 방의 불안정이며 시린 공기를, 그 희미하고 무엇보다 생생한 감미로움도 사랑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빼면 마음에 드는 게 남는다. 마음에 드는 자극 없이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상상력 없이는 강을 건널 수 없으리라. 취향 없이 밤은 너무 길고 컴컴하리라. 이제야 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해진 거라고 인정한다. 운과 뒤섞인 나의 취향이 여기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모든 선택과 망설임, 열망과 침울함이. 자신밖에 될 수 없다는 데 자유가 있다. 그녀는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