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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r 11. 2022

3월

서른다섯 번째 봄  




  어제 바깥으로 나가 연남동까지 걸어 갔다가 걸어 돌아왔습니다. 십년 전에는 홍대 입구 역 근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도 여기저기 그 근처를 거닐곤 했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 두 명은 내가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들인데, 둘 모두 외국에 삽니다. 외국으로 떠난지 각각 7년, 그리고 9년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한 친구는 이 년에 한 번 혹은 삼 년에 한 번 정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게 십 년이나 된 일인지, 7년인지, 1년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어 혼란하기도 합니다. 서른 다섯이 된 다음에, 시간이 십 년이나 혹은 9년이 지난 뒤에도 친한 친구, 가장 친한 친구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들어온 시기가 겹쳐 한 달 안에 두 친구를 모두 만났습니다.

  나는 내가 변한 줄 모르고 아무렇게나 떠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멋대로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내 내 머릿속에 그려진 대로 퍼즐을 같이 맞추자고 지껄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마다 가지고 있는 퍼즐이 달랐습니다. 가지고 있는 메모가 아예 달랐어요. 일기장이 애초에 달랐죠. 나는 화가 치밀 때도 있었습니다. 친구들도 그랬을 겁니다.

  그 때문인지 감옥에 가는 꿈을 꿨습니다. 춥고 어두우며 긴박한 가운데 몹시 쫓겨 다니다가 해가 밝은 뒤 꿈 속의 우리 집인 1층 아파트로 돌아왔고, 부모님도 집에 계시는 가운데 마음이 편해져 집안을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창 밖으로 형사 두 명(십 삼년에 알게 된 맥주를 많이 마시는 남자인 친구와 그의 친구)이 잠복하고 있는 걸 봤습니다. 급하게 현관문 옆의 방으로 숨어들었으나 정확히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꼼짝없이 끝났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몇 년일지 모르겠으나 아주 오래도록 감옥에서 생활해야 할 터라 암담하고 슬프고 두려웠습니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되는대로 문 뒤에 숨어 있었어요. 그러니 곧이어 예전 친구와 문 틈 사이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민망하고 무안했습니다. 이런 처지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그 친구와 친구로 지냈던 몇 년간, 꽤 오래 그는 저를 좋아했습니다. 처지가 뒤바뀌었다 말할 순 없으나 어리고 자신만만하던 저는 인터넷 사기꾼이자 그가 검거해야 될 범인이 되어 문 뒤에 숨어있고, 그는 옛정으로 못본 척 하지 않고 얼른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와 곧장 문 틈에 있는 저를 찾아내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계속 도망쳐 다니다 붙잡혔으니 그저 형사 입장에서 이젠 안된다는 식의 짧은 으름장을 인사 대신 들었을 뿐입니다. 7년 만의 조우였으나, 서로 당연히도 알아봤으나 상황이 이러하니까요. 그렇지만 바로 그가 혹시 나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절박하게 차올랐습니다. 그는 컴컴한 방으로 들어오더니 불을 켜고 문을 닫았습니다. 방 안은 흰 불빛으로 환하게 밝아졌어요. 그는 말없이 내 눈을 들여다봤습니다. 나는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그를 올려다 봤습니다.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있었으나 그가 나를 놓아주거나 어떻게든 도와줬으면 하고 절박한 눈으로 바라봤어요. 그는 내 옷을 딱 잡고 입을 맞춘 채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더럽고 모욕적인 기분이 들었으나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어쩌면 일이 좋게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거든요. 그러나 그는 그대로 내 목 뒷부분 옷자락을 움켜쥐고 방 밖으로 나갔습니다. 부모님이 식탁에 앉아 계셨어요. 나는 머쓱해하며 온 얼굴로 웃어보였습니다. 괜히 걸걸한 목소리를 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어요. 일단 금방 올 거라며 안심을 시키고 싶었습니다. 내가 몇 년을 감옥에서 썩게 될 지 몰라 희망을 갖기엔 너무 긴 시간일 거라 알고 있지만 집에서 이렇게 검거되어 나간다는 게 미안했습니다. 신발을 신는데, 형량을 깎아줄 수 없다며 이틀은 꼬박 썩게 될 거라고 내가 부모님께 한 말에 관한 대답을 그가 무심하게 뱉었습니다. 듣자마자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이틀? 깎아주지 않아도 이틀이라면 내가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왜 이렇게 형량이 낮지?' 그리고 그제야 내가 저지른 죄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려 봤어요. 제가 인터넷에서 자주 옷을 샀던 사이트가 있는데, 그 옷들이 가짜이고 옷을 산 일 자체가 불법이라서 그걸 모르고 샀다고 해도 증명할 수 없는 한 범죄에 꼼짝없이 연류된 거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저는 다짜고짜 도망치기 시작했던 겁니다. 아무튼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데 적어도 20년은 넘게, 어쩌면 평생 감옥에서 살게 될 거라 생각하다 이틀로 줄어들자 마음이 너무나 가볍고 더할 수 없이 산뜻해 꿈에서도 봄 밤을 누비며 가볍고 서늘하며 따뜻하게 느껴지는 대기 속을 거니는 것처럼 마음이 일렁였습니다. 행복감이 마음 가득 차 천진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살고 있다는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의 기억은 자신 위주로, 자신을 보호하도록 재구성된 것입니다. 마음대로 생략하고 재배열한, 감추고 싶은 건 되도록 깊숙이 묻어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저만을 위해서 저의 입맛에 맞도록 꾸며낸 이야기. 평생 감옥에 갇힐 만큼 큰 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렇다는 걸 인정하면 이틀 정도 있으면 석방시켜 줄 겁니다. 다정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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