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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un 13. 2023

Essay #9

할머니 지팡이 관찰록

할머니는 독실한 불교인이다. 독실한 다음에 불교인 단어가 나와서 이상하다. 하지만 그렇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가신다. 여행을 떠난다면 무조건 사찰에 가신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부처님이나 사찰이 나오면, 서툰 핸드폰 조작 기술로 사진을 찍어두신다.


일상 곳곳에도 불교 사랑이 서려있다. 매일 불경 공부를 하신다. 젊은 내가 봐도 작고 꼬불꼬불한 한자가 가득하다. 보기만 해도 뒷걸음질이 처진다. (평소 정말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그렇다.) 할머니를 뵙고 집으로 가기 전, 항상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신다. 전혀 읽을 수 없었지만, 왠지 불경 공부책에 있을 것 같은 말들로.


그 마음의 끝은 내가 보지 못한 기도였다. 내가 수험생 시절,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내신 성적이 좋아도 수능 최저를 못 맞춰서 대학에 못 간다, 자기소개서를 못 써서 대학에 못 간다. 이런저런 고비가 어찌나 많은지. 주중엔 학교, 주말엔 도서관에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다. 그때 꼭 가방에 챙겨두라고 주셨던 부적 패키지(?)는 왠지 모를 든든한 위안이 됐다. 멀리서나마 어떤 큰 기운이 나를 지켜줄 것 같았다. 이게 믿음의 시작인가.


헛된 믿음은 아니었다. 나중에 듣기론 할머니는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절에 가서 절을 하셨다. 나의 수험생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절은 생각보다 엄청난 전신 운동이다. 진심으로 한 동작 한 동작에 집중하지 않으면, 절대 오래 할 수 없는 동작의 집합체다.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이마에 댄다. 허리를 숙인다. 무릎을 꿇는다. 가지런히 모은 손과 이마를 바닥에 댄다. 이마를 떼고 무릎을 펴고 바르게 선다. 한 점에 서서 일어났다 앉는 자세를 반복한다.


가족들 걱정을 짊어진 무릎은 성할 리 없었다. 어느샌가 걸음 속도가 느려지셨다. 또 어느 날부터 일어나는 게 불편해보였다. 하루는 지팡이가 생겼다. 2~3달에 한 번 뵙는 할머니는 조금씩 달라지셨다. 사실 잘 몰랐다. 그저 길에서 본 어르신들도 그랬으니까. 어떤 분은 천천히 걸으신다. 어떤 분은 지팡이를 짚으신다. 똑같이 우리 할머니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가정의 달을 맞아, 할머니댁에 갔다. 오랜만에 다같이 장어집을 찾았다. 1층엔 고기를 팔고, 2층에 올라가야 장어를 파는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나마 계단 손잡이가 있고, 반대쪽은 벽으로 막혀있었다. 엄마, 아빠가 같이 할머니와 올라왔다. 팔을 잡을지, 손을 잡을지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필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잡는 힘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올라와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그 식사 끝에는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인생은 내리막이 쉽다고 했던가? 내려오는 건 한순간이라고. 인생과 실제 계단 내려가기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쉽고, 후자는 오르기보다 훨씬 어렵다. 공통점도 있다. 둘 다 참 힘들고 속상한 일이다. 인생도 계단도 오르기까지 힘듦이 있다. 내려오기도 힘들어야 한다면? 아득한 생각이 밀려온다.


카페라도 넓고 쾌적한 곳을 가고 싶어서 별다방으로 향했다. 근처 카페 중에 매장에 바로 주차가 되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바로 내려서 매장에 들어갔다. 그 순간 내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살면서 본 그 어느 곳도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더욱이 2층으로 된 카페를 떠올려볼까? 대부분 1층에는 좌석이 별로 없다. 2층으로 올라가기 마련이다. 결국 또 계단을 오르고 내려야했다. 계단 아닌 엘리베이터, 그것도 안되면 경사로라도 생기기를 절에 가서 절을 해야 하나.


괜히 마음이 쓰였다. 자연스레 할머니가 쓰시는 지팡이에 눈이 갔다. 손잡이 정가운데에서 지팡이의 긴 부분이 연결되지 않았다. 손잡이에는 짧은 쪽과 긴 쪽이 있었다. 손바닥 길이를 생각하면 긴 쪽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할머니는 짧은 쪽에 손바닥을 댔다. 왜 불편하게 쓰시지? 직접 잡아봤다. 지팡이를 땅에 댔다. 꽉 박히는 느낌이 든다. 이번엔 긴 쪽으로 잡았다. 지팡이를 땅에 콱 대니,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어라? 이러면 안 되지 않나.


지팡이 끝은 뾰족했다. 지팡이가 무릇 다 뾰족해야 땅에 잘 박힌다. 그건 땅이 흙일 때 얘기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바닥은 쭉 미끄러지고 만다. 그제서야 알았다. 이 지팡이는 산악용이구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았을까. 산은 경사진 흙바닥을 걷는 곳이다. 그래서 손잡이의 긴 부분에 손바닥을 대고, 뾰족한 부분으로 땅을 짚으면 지팡이가 적당한 압력으로 박혔다가 빠진다. (짧은 쪽으로 잡고 넣으면 너무 세게 박히겠지.) 요즘 길은 산이랑 다르다. 푹푹 박힐 게 없다. 매끄럽고 잘 닦여있을 뿐이다.


인터넷에 지팡이를 쳐봤다. 아니나 다를까 의료용 지팡이가 있었다. 지팡이 끝에 3~4개의 작은 다리가 있다. 잘 닦인 평지 바닥을 넘어지지 않게 걷도록 최적화된 디자인. 어떻게 지팡이를 잡아도 바닥에 닿는 힘이 골고루 전달되게끔. 참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많다. 절에 가서 절할 생각 대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건 이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걷는 길은 병원 길 같지도 않다.  어느 날은 산 중턱에 있는 절에 가신다. 하루는 집 주변 산책길을 거니신다. 트랜스포머처럼 의료용과 산악용이 자유자재로 바뀌는 게 있으면 좋을텐데. 아이디어가 없으면, 누군가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절을 해야 하나.


자세히 보니 우리 할아버지도 걸음이 많이 느려지셨다. 자꾸 넘어지셔서 다치기시도 한다. 그 키 크신 분이 넘어지셨다니 어디 부러진 곳은 없을지 눈이 간다. 친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다들 이런 시간을 겪으셨겠지. 이제야 변화를 보는 눈이 생기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마침 집에 사둔 책이 있었다. 노인 의학 전문가가 본인과 아내의 노화를 마주하는 과정을 읽었다. 전문가 자신은 주기적으로 치과에 갔다.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일하며 다른 의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운전을 했고, 건강했다. 한편, 아내는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전문가는 본인의 경험과 지식으로 아내를 돌봤다. 그 일은 자신에게도 퇴직 후 삶의 큰 원동력이 됐다. 아내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문제는 아내가 청력을 잃었을 때 시작됐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아내가 생사를 오가는 순간을 거치는 빈도는 점차 잦아졌다. 전문가인 자신조차 요양원 도움에 기대기 시작한다. 결국 예상치 못한 어느 날, 아내는 생을 마감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노화가 주는 공포감이었다. 일반 사람은 그저 노화가 먼 얘기라 준비하지 않는다. 노화는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게 된다. 노화를 이론적으로 바삭하게 이해하고, 심지어 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경험까지 있는 사람이라면 다를까? 아니다. 누구에게나 노화는 처음이다. 그 자신이 경험하는 노화도, 주변 사람이 겪는 노화도. 실체를 모를 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무서움이다. 상대가 어떨지 몰라서, 그 상대로 인해 내가 무엇을 겪을지 몰라서, 그 이후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고령화 사회, 고령 사회, 초고령 사회. 최근 평생교육을 배우면서 노인학을 공부할 때 참 많이 들었다. 뭐든지, 특히 고통은 언어화될 때 그 감각이 무뎌진다고 한다. 2023년의 2분기는 나한테 그런 시간이었다. 언어화되서 무뎌졌던 노화의 감각이 살아난 시간. 우리 할머니로, 할아버지로, 절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도, 우리 부모님도, 나의 주변 사람들도 노화를 겪고 있을 것이다. 참 그건 아직 실감이 안 난다. 아, 실감이 안 난다는 건 절하고픈 마음이 안 들었거나 애달프지 않았다는 의미다. 할머니의 절 그리고 지팡이처럼 부지불식간에 켜켜이 쌓인 신호가 모여야 되겠지. 그제서야 의식하겠지. 슬프게도 그때는 이미 늦었겠지. 이렇게 노화뿐 아니라 나의 감각도 인지도 무방비하게, 무참하게 변해가겠지! 이래서 “있을 때 잘해” 하는 노래가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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