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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an 27. 2024

Essay #12

부모와 한 걸음 가까워지기 위해, 멀어지는 한 걸음

유치원 때부터 친한 친구 E의 외조부가 돌아가셨다. 매일같이 입는 위아래 검정옷도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퇴근 후에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에 슬픈 노래를 들을지, 밝은 노래를 들어야 할지 고민됐다. 나보다 하루 먼저 장례식장에 간 엄마는 말했다. 친구 E가 웃고 있었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도 장례식 1~2일차에는 실감이 안 나서 울지 않았다. 그때 내게 힘이 된 건 '슬픔에 공감해주는 위로'였는지, '조금이라도 밝은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에너지'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가는 길 내내 유튜브 알고리즘에 노래 선곡을 맡겨버렸다. 그저 나오는대로 좋든 싫든 노래를 들으며 갔다.


친구 P를 장례식장 입구에서 만났다. 나보다 더 검게 위아래로 차려입었다.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나를 '이쪽으로 가면 돼' 라며 이끌었다. 괜시리 친구 P가 의젓하게 느껴졌다. 장례식장을 얼마나 와본 걸까. 그 자리에서 이 친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찰나에 스친 생각을 뒤로 하고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부조금 봉투에 이름을 적는 곳도 척척 알고 있는 P였다. 13살에 만나 철없던 시절에 어느새 10년이 넘는 시간이 쌓였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작년 연말에도 보지 못한 친구 E였다. 엄마 말대로 E는 괜찮아 보였다. 너무나도 수척해지신 E의 어머님을 뵀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아있는 내게, '우리 엄마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쩌지?' 싶었다. 항상 "지병으로 너무 오래 앓으시기보다 어느 한 날에 편히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엄마 얼굴이 겹쳤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사람도 말도 참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멀쩡히 살아계신 분들께 죽음이라니. 당장 이번 설에는 어느 맛집에 모시고 갈지, 무슨 선물을 드릴지 고민하기에도 부족한 생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던 내게 E 어머님의 모습은 남일 같지 않았다. 내 부모님이 어느 날 갑자기 넘어지셔서 세상을 떠나신다면, 설까지 기다릴 새도 없이 가신다면, 오히려 바람은 '설에 뭐할까?'가 아니라 '편히 가시면 좋겠다'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엄마가 항상 "너도 나이 들어봐" 라고 하는구나.


장례식장에서 P, E와 함께 나왔다. 잠깐 바람 쐴 겸 따라나온 E였다. P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E에게 "시험 언제 끝나? 끝나고 한 번 보자." 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E는 소리도 없이 눈물만 떨어뜨렸다. 굵고 투명한 눈물을 뚝뚞 떨어뜨리는 E에게, "시험이 그렇게 슬펐어?" 라고 했다. E는 살짝 웃으며 "그러게, 시험이 슬프네." 라고 했다. 마침 E의 아버님이 친구 분들과 나오셨다. 우리를 보지 못하셨지만, E는 아빠를 보자 눈물을 쓱쓱 닦았다. 그 모습을 보는데 괜시리 마음이 아팠다. P와 내게 부고를 전할 때도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신다" 라고 말했던 E였다. 본인도 참 슬프고 힘들고 울고 싶을텐데, 애써 참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린 분명 7살에 만나서 이제 20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동안 E는 너무 커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힘들다고 징징거리던 우리는 이제 부모님께 힘든 모습을 숨길 줄도 알았다.


친구 P와 와인집으로 갔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면 휴게소 같이 사람 많은 곳을 가야 한다더라." 하는 미신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와인집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야기 막바지 무렵, P는 사랑 표현에 대해 말했다. 아빠가 아프고 나서부터 "아빠 사랑해! (손 하트 모양) 근데 왜 아빠는 표현 안 해?" 라고 자주 말한다며. 진짜 쑥스럽지만, 그리고 아빠도 쑥쓰러워하지만, 아빠도 손 머리 위로, 손으로, 각종 다양한 하트를 보내준다고 보여주었다. 그 말에 "우리 집은 그렇게 애정 표현하는 집이 아냐." 라고 했다. 그러자 P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가 아프고 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아빠를 더 사랑하는 거라고. 아빠만큼이나 자신이 징징거리고 더러워도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는 세상에 없다고. 


우리에게 지난 십여년은 '부모님과 한층 가까워지면서 멀어진' 시간이었다. E는 자신의 슬픔보다 부모님의 슬픔을 먼저 보았고, P는 자신의 부끄러움보다 부모님의 생을 먼저 보았다. 그래서 일부러 쓰는 가면이 있었다. 울지 않는 가면, 사랑을 표현하는 가면. 가면 안에서 어떤 마음인지를 어렴풋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건 우리가 같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어린 시절이던 그때의 부모에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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