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이제 그만 시험에 들게 하소서

고등학생-대학원생, 10년 주기로 찾아온 유혹

by 보라

1. 고등학교 3학년 12월. 수시 전형으로 6개 대학에 지원했고, 수능은 끝났다. 이미 3개의 대학이 합격 소식을 전했고, 1개 대학이 불합격을 알렸다. 가장 최상위 2개 대학의 결과를 기다렸다. 결코 재수는 없다, 수시파는 올해 수시 성적과 수능 최저 기준으로 대학에 가고야 만다는 마음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2. 12월에 고3은 학교도 잘 안 나온다. 체험학습 등을 이유로 수능 전까지 켜켜이 묵혀둔 소원풀이를 하느라 다들 바쁘다. 간혹 학교를 가는 날이면, 맨 꼭대기 3학년 층은 텅 비었다. 바로 밑에 2학년 층은 꽉 찼는데도 살벌한 고요가 가득하다. 그 적막 사이에 나를 자극하는 소문이 들렸다. “야, 이과에서 전과한 친구가 이번 기말이라도 전교 1등 하려고 한대."


3. 대학 입시에서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성적이 중요해진다. 고등학교 3년 과정에서 1학년보다는 2학년이, 2학년보다는 3학년 1학기까지의 성적이 대학 입시 비중이 크다. 슬프게도, 3학년 1학기는 유일하게 전교 1등을 못한 시기였다. 그런데 이제와 3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4. 1학기 전교 1등을 놓친 내게 달콤한 유혹이 있었다. 수능도 끝났겠다, 2학기 기말고사는 OMR 카드에 직선, 하트 모양, 원 모양 등 내가 꾸미고 싶은대로 정답을 표기해보는 것. 진짜 별 게 아니었는데, 꼭 그게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5. 전과한 친구가 1등을 노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에 엄청난 자극을 받은 건 사실이다. 이 자극은 OMR 카드에 그림 그리기 유혹을 떨쳐내고 내 인생에서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을 고3 2학기 기말고사 공부로 이어졌다. 수능 과목도 아니었던 동아시아사, 일반사회, 물리1(문과에서 들어야 하는 교양 과목이 이과 과목이라니)을 포함해서 모든 과목을 공부했다. (이럴 힘이 없었는데, 어디서 나온 거지)


6.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3학년 2학기 전교 1등. 그 덕분에 졸업식에서 성적 우수자로 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그 성적은 그 영광 말고 그 어디에도 쓰이지 않았다. 인생은 진짜 알다가도 모른다. (이것과 별개로 감사하게도 기다리던 대학 2개도 합격 소식을 전했다.)


7. 신은 내 반응이 재밌었고, 다시 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석사 4학기에 2개 과목을 수강하고 있다. 알아보니 이미 학점 초과라서, 2개 과목 모두 박사 과정 때 학점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마침 박사 과정 때 융합전공을 목표로 해서 무려 54학점이나 이수했어야 하는 터라, 2개 과목(6학점)을 박사 때 인정 받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학과 사무실에 박사 과정 학점 인정을 문의하니,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점 인정을 받은 과목은 학점은 인정되지만 성적은 A+, B0 이런 식으로 남지 않고 S로 기록된다는 것.


8. 아, 이렇게 또 한 번 성적이 아무 의미가 없는 유혹이 찾아왔다.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는 OMR 카드 대신 텅 빈 서술형 답안지를 받았다. 우스갯소리로 그 텅 빈 종이에 교수님께 드리는 편지를 구구절절 써보면 어떨까 하기도 했다. 19살에 놓친 기회가 또 28살에 왔다. 자,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9. 박사 과정에서 성적은 안 남을 거고, 박사 이후의 삶에서도 그 성적을 꼭 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석사에서 박사로 넘어갈 때, 보건, 경제, 그리고 데이터사이언스를 제대로 알면 나쁠 게 전혀 없다. 어쩌면 공부하다가 또 연구 아이디어가 샘솟을지도! 이런 생각에 밤낮없이 공부 자료랑 씨름하는 나를 보며 가족들이 말했다. “왜 하늘이 쉴 기회를 줘도 너는 그걸 받지를 못 하냐.” 그제서야 알았다. 아, 이게 자극이 아니라 쉴 기회였어?


10. 사람이 쉽게 변하면 죽는다고 그랬던가? 지금 나는 살아서 글을 잘 쓰고 있다. 이말인 즉슨, 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시험을 잘 봤다. 물리적인 무게는 쪽쪽 빠졌지만, 내 머릿속 무게는 엄청 무거워졌으리라.


11.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하늘이 하려던 것이 나를 시험하는 것이든, 내게 배려를 한 것이든 사실 그 높은 뜻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으랴. 다만 두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됐다. 어떤 상황이든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우공이산해본 경험은 어느 순간엔가 번뜩 나타나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해야 할까?’ 싶은 순간에 큰 용기를 준다. 약 10년 뒤, 같은 시험? 기회? 가 찾아오면, 분명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시험(신이 주시는 것이든 학교가 주시는 것이든,,)은 그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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