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서막
시즈오카로 떠났다. 후지산을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라 도시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행 앱과 여행 유튜버에 기대 여행 첫 날의 마지막 일정을 오뎅바로 정했다. 하얀 후지산만큼이나 검은 오뎅이 궁금했다.
10층 정도 되는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 주황빛 나무와 핑크꽃이 즐비한 작은 골목이 나온다. 골목 양옆에 8명 남짓 앉을 만한 가게가 따닥따닥 붙었다. 가게 천장에서 내려오는 흰 천과 그 위에 적힌 커다란 검은 글자가 가게 내부를 가린다. 살짝 허리를 굽혀 가게를 들여다보면 사장님이 오뎅 끓이는 기계와 도마 안쪽에 서있다. 그 주변에 손님들이 다 앉아있다. 두 명씩 와서 서로를 보며 대화하거나 혼자 와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허리를 숙였다 폈다, 고래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눈여겨 봐둔 가게가 맞는지, 자리가 있나 살핀다. 유튜브에서 본 가게에 미닫이 문 바로 앞자리가 딱 두 개 남았다. 주저할 새 없이 바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곰 내밀고 앉아도 되는지를 영어로 물었다. “Can I get in?”이라는 질문에 흼머리가 가득한 남자 사장님이 미소와 함께 일본어로 대답했다. 나중에서야 그 사장님과 안쪽에 계신 여자 사장님이 70대라는 걸 알았다. 그 정도로 영어를 훌륭히 하셨고 손님이 몇 살이든 재미지게 대화를 이끌어주셨다. 아, 맥주잔이 반쯤 비었을 때 스윽 술을 첨잔해주시는 센스까지 녹슬 것 같지 않다.
내 오른쪽에 앉은 메이트와 한창 대화하던 중, 내 왼쪽 자리가 하나 비었다. 나와 메이트 또래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이 일본어로 사장님과 대화하며 들어온다. 우리가 의자를 꺼내주려고 하자 그녀가 말한다. “감사합니다.” 우린 말 그대로 눈 튀어나오게 놀랐다. 우리가 잘못 들은 걸까?
급히 2주간 듀오링고에서 레벨1부터 일본어를 배웠다. 서툰 일본어에 영어를 섞어서 그녀와 대화를 시도한다.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어요?“로 시작한 대화는 나와 메이트가 가게를 나갈 때까지 이어진자. 영어, 일본어, 한국어가 우리의 입과 핸드폰(번역 앱)으로 오간다. 우리 대화가 재미졌는지, 남자 사장님과 여자 사장님도 우리 대화에 들어온다. 심지어 나중에 새로 가게 들어온 남자 손님도 우리와 신나게 떠든다. 이 작은 가게에서 시끌시끌한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언어의 맛을 느낀 우리는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본 유튜브 영상에는 한국어 메뉴판이 없었는데, 우리가 쥔 한국어 메뉴판은 또박또박 예쁜 글씨체로 적혀있고 심지어 글자 위를 두 줄로 긋고 수정한 흔적이 여기저기 많다. 이 감동을 어떻게 보답하지 궁리하다가 메뉴판에 적힌 두 ”어묵“ 한글에 다른 일본어 메뉴를 포착한다. 다음에 올 한국인 손님에게, 그리고 그들에게도 변함없이 따스할 사장님 부부를 위해 우리가 고쳐드리자! 그 마음에 일본어 메뉴명을 하나씩 가리키고 모든 오뎅이 끓고 있는 통을 가리키며 ”고레와 난데스까?“를 묻는다. 애매하다. 하나는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다란 원통형 어묵이고, 다른 하나는 너구리 라면에 들어가는 뾰족한 흰 톱니바퀴 모양에 분홍 회오리가 있는 어묵이다. 맞지, 둘 다 어묵이긴 하다. 이걸 알고 메이트랑 애매하게 웃으며 일본인 친구(그세 친해졌다)와 사장님께 온갖 언어로 설명한다. 다들 놀라고 웃는다.
나와 메이트는 사장님께 메모지를 요청한다. 번역 앱에 기나긴 감사 인사를 한국어로 적고, 일본어로 바꾼다. 쭉 내용을 읽어 보고, 일본어로 적힌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벜역해본다. 음, 꽤 괜찮네. 그제서야 메이트가 가지고 있던 펜을 꼭 쥔다. 6세 어린이가 쓸 법한 글씨체로 히라가나와 한자를 적어내린다. 그 메모가 궁금했는지 남자 사장님이 슬쩍 우리 곁에 와서 뒤집어 둔 메모를 읽는다. 창치한 마음에 사장님에게 외친다. “Not yet!” 사장님은 웃으며 순순히 메모를 돌려준다.
남자 사장님은 우리가 가게를 나올 때 50엔을 주며 “서비스!”라고 외치신다. 거스름돈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서비스다. 손님이 사장님에게 서비스를 받기도 하나?
그새 친해진 일본인 친구는 알고 보니 정말 우리 또래였다. 서로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하고 숙소로 간다. 오늘 즐거웠다는 디엠이 한국어로 온다. 그녀 덕분에 알게 된 배려를 담아, 나도 일본어로 내일 또 만날 수 있을까 물었다. (다음 에피소드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