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시부모님과 아기 키웁니다만 #15 - 에필로그
런던 버스 188번, 그 평범한 노선 위에서 한 인도 남자를 만났다.
그 만남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금 나는 인도 중부의 작은 도시, 이탈시(Itarsi)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며 육아휴직 중이다.
단지 대문 밖으로는 소가 울고, 옆집에서는 향신료 볶는 냄새가 퍼진다. 낯선 풍경 속에서 나는 여전히 나를 찾아가고 있다.
나는 한국인, 남편과 그의 가족들은 인도인. 언어도, 음식도, 명절도 다르지만 결국 사람 사는 일의 본질은 비슷하다는 걸 매일 깨닫는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또 하루를 견디는 일 — 그건 어느 나라에서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낯설 만큼 새로운 역할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육아’와 ‘인도’ — 두 개의 신세계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다.
글쓰기가 치유가 된다는 말을 그전엔 잘 믿지 않았다. 그런데 아기가 잠든 틈에 휴대폰을 들고 이렇게 몇 줄씩 써 내려가다 보면, 묘하게도 마음이 정리된다. 영어로 남편과 대화하고, 힌디어 몇 마디로 시부모님과 의사소통을 하다 보면 하루 종일 말을 해도 이상하게 ‘나’는 사라진 기분이 든다. 그래서 글을 쓴다. 잃어버린 ‘나’를 문장 속에서 다시 불러내기 위해서.
임신 초기, 인도에서 입덧으로 고생하던 때에는 정말 정말 힘들었다. 한국에 가족들도 너무 보고 싶었다. 아마 입덧과 향수병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버티며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다시 인도로 돌아온 지금, 나는 인도를 조금 다르게 본다.
엄마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엄마로서의 삶이 시작된 지금, 내 하루는 먹이고, 재우고, 닦고, 쓰다듬는 일의 연속이다.
예전의 나는 워커홀릭이었다. 회의, 이메일, 보고서, 마감. 그 사이에서 스스로를 꽉 조이던 나는 이제 아기가 낮잠을 자는 동안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법정 스님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잠시 쉬어갈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그 곡선 위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아기가 내 품에서 잠들 때면, 세상의 모든 것이 잠시 멈춘다. 그 조용한 순간에 문득 깨닫는다. 지금 이 아이에게 나는 세상의 전부라는 사실을.
그리고 언젠가 이 아이도 나처럼 자라,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 품을 떠나는 건 서운하지만,
모든 생은 그렇게 흘러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인도에서의 삶도 본격적으로 시작이다
인도에서의 삶도 이제 진짜 시즌 2가 시작됐다. 한때는 코를 찌르던 향신료 냄새가 이제는 “우리 집 냄새”처럼 느껴지고, 시장 골목의 소음도 더 이상 소음이 아니라 이탈시의 배경음이 되었다.
아기는 두 나라의 언어와 음식, 냄새, 그리고 리듬 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한국 국적의 인도–한국 혼혈 아기로서, 비빔밥도 먹고 라씨도 마시는 아이. 그 아이가 두 세계를 자연스럽게 오가며 살아갈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모르게 뭉클하다.
물론 현실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한국에서도, 인도에서도 다른 피부색과 이름은 여전히 호기심과 편견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아이가 자랄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다정하고, 조금 더 열린 곳이 되어 있을 거라고. 이미 한국에는 수많은 다문화 가정이 있고, 앞으로는 더 많은 ‘세계의 가족’이 생길 것이다. 뉴스 속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받는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지만, 그럴수록 나는 바란다 — 한국이 더 다양한 얼굴과 이름을 포용하는 나라가 되길.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아 ‘엄마’라는 이름이 주는 고독과, ‘인도’라는 낯선 세계가 주는 놀라움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육아와 인도, 이 두 세계가 내게 가르쳐준 건 의외로 단순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오늘도 나는 아기를 재우고, 향신료 냄새가 가득한 부엌을 지나 노트북을 켠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여전히 ‘나’로서. 이 글을 쓰며 나는 오늘도,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도의 향신료처럼 진하고, 육아처럼 예측 불가한 앞으로도 인도에서의 일상을 꾸준히 나눠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