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장편소설을 뒤늦게 읽고서
한창 초록이 돋보이고 있는 요즘에 딱 어울리는 소설을 찾았다.
"한여름 빛났던 부모의 들뜬 시절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가장 늙은 소년의 이야기"
도서관에서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이 책은 권장도서 서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꽤나 인기 있던 과거를 뽐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뒤늦은 감상으로 보이겠지만, 그냥 내가 읽을 때가 내게 가장 좋은 때라 우기며 배짱을 부려본다.
그저 너무 좋았다. 이 마음을, 이야기를 내 안에 채우며 <두근두근 내 인생>을 위한 짧은 찬가를 하나 써본다.
책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바람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정적을 깨우는 실바람, 바람이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남실바람, 산들, 건들, 흔들… 고요에서 싹쓸바람까지 바람의 열세 계급을 따라 내 마음도 초록으로 물들었다. 곧이어 주황이 되고 빨강도 되었다. 아, 소설이란 이런 거구나.
이 책으로 만든 영화도 있다지만 선뜻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단지 주연배우가 내가 상상하던 이미지와 달라서만은 아니었다. 주인공 아름의 혹은 작가 자신의 얘기인 듯한 내레이션을 따라 읊조리며 그중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골라보았다. 역시 마음속에서 한 바퀴 두 바퀴… 단어들을 가만히 내 안에서 굴려보는 일은 글을 느리게 읽는 속도로만 가능한 것이리라.
누군가는 어떻게 천천히 읽었냐고 묻는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냐고. 당신은 그 자리에서 거의 한 번에 읽었다고. 나도 간혹 흥미로운 소설을 접할 때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럴 때면 매번 눈과 손을 재촉해가며 서둘러 읽곤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첫 문단을 읽고 나서 나는 적잖은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당시에는 그걸 몰랐지만, 그것은 한 소설을 향한 커다란 애착의 예감, 그 그림자에 드리워진 불안, 그리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몰라 어떻게 읽어가는 것이 적절한지 알 수 없는 기분 때문이었다.
한 번은 나의 눈으로, 또 한 번은 아름의 눈으로… 그렇게 두 번. 문장 하나에 휘둥그레지는 눈동자. 그걸 보고 멈추는 손의 움직임. 그 속에는 이 소설에 대한 경탄과 경이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주인공의 눈을 통해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무르익어가는 내 자아의 모습… 어디가 원인이고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놀라운 일이었다. 가장 나답지 않게 사고할수록 가장 스스로 지혜로워지는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났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하는 일은 내내 비슷했다. 느리게 읽고 천천히 생각하고 몇 구절을 필사하는 것. 아름이의 말을 따라가며 대수와 미라의 말소리를 듣는 것. 장씨 할아버지와 아름이의 사소한 대화에 귀 기울이는 것. 서하의 편지에 연민과 탄식을 내뱉는 것. 이야기가 내게 거는 말에 일일이 답해주는 것. 때론 뜻을 알 수 없는 낱말들을 줄줄이 적어 비밀편지를 보듯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 그런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소설을 읽는 일보단 발췌하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읽기는 모든 글에 하는 거지만, 쓰기는 그렇지가 못했다. 어떤 문장을 골라야 했고, 최소한 그 단어들을 왜 건져 올렸는지 알아야만 가능한 일이 바로 ‘필사’였다. 가만히 눈으로만 읽었으면 하지 않았을, 말 그대로 내가 뭔가 ‘쓰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도 눈과 손만이 아니라 ‘마음’을 사용해서 한 일… 그게 또 ‘마음’이라, 적절한 답을 찾는 것은 ‘마음’이 해야 하는…
책을 다 읽은 날, 나는 오랜만에 꿈을 하나 꾸었다. 여느 때와 달리 선명하고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꿈이었다. 가슴이 벅찰 정도로 환한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아름이는 어느 들판에서 트램펄린을 타고 있었다. 퉁- 하고 튀어 오른 뒤 시원하게 웃고, 다시 퉁- 하고 날아오른 뒤 눈을 감았다. 그러곤 하늘 높이 솟을 때마다 만세 자세를 취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쿵쿵 짝 쿵쿵 짝…
“두근두근 그 여름을 써낼 거야.”
그렇게 몇 번이고.
“몇번이고?”
지나가는 바람이 되물으면,
“몇번이고.”
오고 있는 바람이 대답할 때까지 말이다.
(p.50)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p.58) 그리고 그렇게 큰 기적은 일생에 한번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어쩜, 그때 나를 살린 것은 당신들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고 싶은 바람, 혹은 당신들과 함께 꾸는지도 모른 채 같이 꿨던 꿈들이었을까…
(p.63) 한번은 자신의 눈으로, 또 한번은 아기의 눈으로… 그렇게 두 번. 딸랑이 소리 하나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아이. 그걸 보고 웃는 부모. …. 가장 어리게 사고할수록 가장 지혜로워지는 일들이 매일매일 일어났으니 말이다.
(p.96) 고작 열일곱살밖에 안 먹었지만, 내가 이만큼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철저하게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려면, 살아 있어야 하니까.
(p.208) 누군가의 대답 속엔 누군가의 삶이 배어 있게 마련이고, 단지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당신들의 시간을 조금 나눠갖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