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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즈 Jul 06. 2021

긴긴밤을 견디는 아름다운 연대

<긴긴밤>(문학동네, 2021)를 읽고

 서점에 가면 아이의 책을 골라준다는 명목으로 동화책 코너를 둘러보곤 한다. 어느 날 화려한 학습만화와 캐릭터가 넘치는 매대에서 조용하게 눈을 잡아 끄는 책이 있었다. 앞면은 에메랄드그린과 복숭아빛 하늘, 뒷면은 보라색 풀빛이다. 은은한 색감에 마음을 쏙 빼앗겼다. 앞표지의 '얼굴을 맞댄 코뿔소와 펭귄'은 무심히 넘기며 책을 펼쳤다.

 



이야기의 시작.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이름이 없는 주인공 '나'는 이렇게 이야기의 문을 열어두고는 곧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들 중 하나인 코뿔소 노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노든은 코끼리 보호소에서 긴 코들에 둘러싸여 자랐다. 긴 코들의 돌봄과 사랑과 지도를 받았다. 노든은 자신이 코뿔소의 모습을 가진 코끼리라고 여겼다. 코끼리는 강했고 바람보다 빨리 달렸다. 그러나 무모하지 않았다. 코끼리는 스스로의 목숨도, 남의 목숨도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 속에서 자라면서 노든은 현명한 코끼리의 모습을 선망했다. 그러나 코뿔소의 모습을 가진 그는 바깥세상에 있다는 자신과 닮은 존재들을 궁금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서 야생 속으로 나가게 된다.

p.16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노든도 본래는 이름이 없었다. 그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큰 불행의 결과이기도 하다. 야생으로 나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가족을 이룬 시기. 행복과 사랑으로 마음이 충만해진 그때, 그는 인간들을, 즉 불행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노든이라는 이름을 갖고 갇히게 된다. 자유와 가족과 뿔을 잃어버리며 좌절에 빠진다. 동물원에는 다른 동물들도 있었다. 노든은 다른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평생 동물원에 갇혀 지낸 코뿔소 앙가부를. 바다를 본 적 없는 펭귄 치쿠를. 그리고 한없는 돌봄이 필요한 알 속의 ‘나'를.


 이야기는 줄곧 사막을 지나고 황량하고 척박한 곳에서 이어진다. 전쟁통에 동물원에서 탈출하게 된 노든과 치쿠는 알을 돌보며 바다를 찾아 쉬지 않고 걷는다. 그 여정은 험난하고 힘겹다. 위험한 벌레나 동물, 독이 있는 식물, 계속되는 모래까지… 위험을 피하는 일을 제외하면 그들의 일과는 먹고 자고 걷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긴긴밤'이 있었다.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그들은 긴긴밤을 이야기로 채워 넣는다. 노든의 가족과 코끼리들, 앙가부, 치쿠, 윔보의 얘기들을 말하고 들으며 밤을 견뎌냈다. 그리고 서로에게 따뜻하게 기대며 의지한다. 사막을 지나 긴긴밤을 넘어서, 흰바위코뿔소와 어린 펭귄이 사막에서 살아남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p.83
...내가 바라보는 풍경을 노든도 보았고, 내가 있는 풍경 속에는 언제나 노든이 있었다.


p.94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윔보와 치쿠가 버려진 알을 품어 준 것부터, 전쟁 속에서 윔보가 온몸으로 알을 지켜 내 준 것, 치쿠가 노든을 만나 동물원에서 도망 나온 것, 마지막 순간까지 치쿠가 알을 품어 준 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노든이 있어 주었던 것....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마주한 '수영'이라는 것이 그나마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었다. 펭귄이 수영을 하는 데에 기적이 필요하다는 건 들은 적 없다.


 그들은 각자의 바다에 도달하게 된다. 노든은 초록으로 일렁거리는 지평선 앞에서 오롯이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된다. '나' 또한 끝없는 파란 지평선을 맞이하며 거대한 바다 앞에 선다. 그리고 '나'는 이제껏 자신을 지키고 키우고 살아남게 해 준 연대를, 긴긴밤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삶이란 사막을 건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바다를 찾으며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중간에 힘이 빠지거나 멍들고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걷고 달리며 각자의 긴긴밤을 보내고 있다. 우리를 견디게 하는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아니면 그 누군가는 누구일까. 이 이야기를 읽으며 또 다른 존재와의 연대를 생각해본다. 혹시 나와는 아주 달라 보일 수도 있는 존재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지는 않은가. 코끼리들과 코뿔소, 노든과 치쿠가 서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다른 그 누군가가 떠오르진 않는지.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주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볼 일이다. 어쩌면 언젠가, 그 누군가를 만난다면 코뿔소의 코와 펭귄의 부리가 맞닿듯이 그렇게 인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p.99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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