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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즈 Jul 26. 2021

초록의 생명들에게 배우다

<식물학자의 노트>(김영사, 2021)를 읽고

식물학자의 노트_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글. 그림, 280쪽


 봄맞이꽃의 꽃말은 봄의 속삭임입니다. 정겨운 이름의 이 꽃을 실제로 만나기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땅바닥에 가까이 엎드려야 보일 정도로 깜찍한 꽃이기 때문이지요. 저자는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식물도감을 보고 알게 된 꽃이라며 봄맞이꽃 소개를 속삭이곤, 식물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글쓴이는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과학자이면서, 식물을 그리는 화가입니다. 어린 시절에 자연과 무척 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과 들을 누볐고 어머니의 정원에서 오랜 시간 식물을 관찰해왔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저의 유년 시절도 떠올려 봅니다. 소도시에 살아서 흙보다는 시커먼 아스팔트를 더 많이 밟았습니다. 검은색 바닥을 작은 발로 열심히 차면서 고무줄놀이를 하던 것이 떠오릅니다. 그러다 싫증이 나면 놀이터 옆 작은 풀밭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네잎클로버 찾기에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혹은 민들레 홀씨를 불기도 하고, 친구들과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공기놀이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자연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훌쩍 커서 더는 풀밭에 털썩 앉진 않지만, 오며 가며 만나는 화단의 꽃이나 가로수를 한 번씩 물끄러미 눈 맞춤하고 싶을 때가 생깁니다. 예쁘다. 곱다. 싱그럽다. 하며 칭찬의 말을 건네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식물을 거의 알지 못하는 저는 친하지 않은 친구에게 어색한 말만 내뱉고 돌아서듯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 다를 것 같네요.

 

 그동안은 자연이라는 묶음으로 하나로 뭉뚱그려 보아 왔지만, 식물학자의 노트를 통해 각각의 특별한 식물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길가에서 홀씨를 후후 불던 민들레는 국화, 해바라기와 같은 국화과 식물이라고 합니다. '두상화서'라고 하는, 작은 꽃들이 모여 한 송이처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꽃 안의 꽃들이 맺은 씨앗이 그리 촘촘하게 모여있던 거였습니다. 코스모스, 상추, 다알리아 등 전 세계 국화과 식물은 3만 2천 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함께 모여 더 크고 아름답게 피어나며 더욱 번성한 것입니다.

국화과 식물인 민들레와 해국

 페이지마다 저자의 정성스러운 그림이 눈을 잡아 끕니다. ‘학술도해도’라고 하는 식물 연구를 위한 학술용 그림이라,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닌데도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아마 이것은 식물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씨앗의 여러 단면, 잎맥의 무늬, 열매의 오돌토돌한 표면들에 눈을 크게 뜨게 됩니다. 가까이서 보니 이렇구나. 네 안에는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꽃송이의 화려함에만 눈길을 주고 열매의 달콤함만을 취하던 스스로를 잠시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흔하디 흔한 고사리, 은행나무는 고생대부터 있어온 식물입니다. 고사리는 땅 위로 올라온 최초의 식물이며 최초의 나무이기도 합니다. 고사리의 오래된 적응력과 유연성에 감탄하게 됩니다. 반면, 은행나무는 오래도록 살아왔지만 자매종이 하나도 없는 외로운 식물입니다. 현재는 인간이 유일한 매개 동물이며 야생 개체는 없다고 여겨진다 합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역시 한 종만 살아남았는데 현재 볼 수 있는 대부분은 사람이 재배한 것이라고 하네요. 주변에서 가로수, 정원수로 흔한 평범한 나무라고 생각해왔는데 인간에 좌지우지되는 희귀종이라고 하니 왠지 미안하고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고사리와 은행나무


 저자는 멸종위기 식물들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한라산 백록담에만 사는 한라손다리, 멸종위기 2급의 나도승마와 으름난초를 소개해줍니다. 그러면서 귀하다는 것은 왜 항상 쟁취와 정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되물으며 꾸짖습니다. 지구 상에 오랫동안 진화하며 살아온 식물들이 인간의 활동으로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식물들은 우리 곁에서 말없이 지혜와 향기를 선물합니다. 우리가 진통제나 해열제로 사용하는 아스피린, 말라리아 치료약인 퀴닌에는 나무껍질에서 유래한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녹나무과 식물의 향으로 해충을 퇴치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 씨앗에서 기름을 추출해 동백기름처럼 사용하며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로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식물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는 어쩌면 식물이 인간보다 더 진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모습을 보면 일리 있는 말입니다. 우선은 꿋꿋이 혼자 살아가는 것부터 본받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어지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면 식물과 같은 마음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혹은 외로운 순간을 마주했을 때 더 외로운 식물을 보며 위로받을 수도 있습니다. 울릉도 도동항 절벽 끝에 2천 년을 넘게 홀로 자라는 향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광대한 바다를 바라보며 묵묵히 서있는 그 마음을 우리가 가늠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나무의 시간에서 바라보면 지금의 번뇌와 외로움은 먼지처럼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지구에서 번성하고 있는 또 다른 생명인 식물들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그들의 생명력과 지혜를 한 줄기 배우고 싶습니다.





#예스24X문화일보 #국민서평프로젝트 #읽고쓰는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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