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장편소설 <밝은 밤>,343쪽 (문학동네,2021)
가끔 나의 할머니의 얼굴을 상상해본다. 궁금해질 때가 있다... 엄마를 지나 할머니, 또 그의 어머니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영상매체를 통해 보았던 전형적인 옛날 여성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건 희뿌연 역사자료 같은 하나의 이미지이다. 구체적인 실체로 숨 쉬고 얘기하고 살아냈을 예전 누군가의 얼굴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다들 조부모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 부끄럽게도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 네 분 중 세 분은 만나 뵌 적이 없고(생존해계시지 않아서) 한 분은 유아기 때 희미한 실루엣으로 남아있다. 안타깝지만 모두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신 터라 조부모 특히 할머니의 정이 어떤 건지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동화책이나 티비를 통해 소개되는 '한없이 넉넉한 할머니의 사랑'은 그 자체로 전래동화 같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이렇게나 커다래. 할머니는 저렇게나 푸근해. 내게 과시하며 으스대는 이야기들. 마음 한 구석 결핍으로 생각해 왔지만, 사실 알지 못하고 겪어보지도 않은 것은 아쉬울 것도 없는 법이라... 그런대로 개의치 않고 살긴 했다. 뿌리에 대한 궁금증도 급할 거 없다며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4대에 걸친 여성의 삶을 관통하는 <밝은 밤>을 만나기 전까지는.
첫 문장. 나는 희령을 여름 냄새로 기억한다.
소설 속 ‘희령’이란 도시는 주인공 지연이 열 살 때 할머니와 추억을 만든 곳으로, 서른두 살이 되어 상처를 가득 안고 숨어 들어가는 곳이다. 언니의 부재로 인한 아픔,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 그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모진 말들을 모두 품에 끌어안고 희령으로 도피한다. 바다 곁 외진 시골 도시이지만 천문대가 있어 지연은 그곳의 연구원 자리를 얻게 된다. 바다가 보이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고 혼자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여러 날을 잠 못 들며 스스로를 몰아세우던 날들을 돌아본다. 홀로 숨죽여 울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p.14)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연은 여전히 희령에 살고 있는 할머니와 마주친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가 단절되며 이십 년 넘게 왕래하지 않아 처음엔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런 만남이 지연은 어색하고 어렵기만 했다. 조금은 남다른 조모와 손녀의 관계가 조심스레 시작된다.
(p.29) 할머니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는데. 네가 누구 닮았는지.”
지연이 자신의 엄마인 증조모와 꼭 닮았다고 말하는 할머니.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자 둘을 보여준다. …”어떤 분이셨어요?”
그렇게 증조모 이정선, 보통은 삼천 아주머니라고 불리는 한 사람의 생이 할머니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증조모와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남겨진 편지를 읽게 된다. 지연은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깊숙이 이야기에 빠져든다.
지금은 가 닿을 수 없는 북녘의 땅, 삼천이라는 곳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개성에서 휘돌았다가 한국전쟁을 겪으며 피난길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온다.
백정 출신의 증조모와 그의 유일한 친구인 새비아주머니의 사연과 우정은 또 다른 실체처럼 생생히 살아난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배경으로 개성에서부터 희령으로 다다르는 지난한 세월이 거세게 몰아친다.
(p.55)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p.120)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러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그들의 딸들인 할머니와 희자라는 분의 이야기도 있다. 그들의 우애는 전쟁통 속에 어지럽게 헤매고 아픈 현대사에 부딪히며 이별을 겪는다.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은 소설의 끝에 손녀인 지연에게 까지 다다르게 된다. 끝내 만나는 강물처럼 희령에 모여든 여러 겹의 상처들은 그렇게 회복해간다. 서서히 밝아지는 밤처럼.
소설을 덮으며 오래 묻어왔던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던 의문들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할머니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국전쟁을 겪었고 일제강점기를 살아냈을 그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힘겨웠을까? 일제강점기라니, 한국전쟁이라니. 그게 분명 역사로 남아있긴 하지만. 나의 직계 조상이 겪었을 어떤 구체적인 상황과 생사가 갈리고 그걸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었을 여러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려고 하니 소름이 돋고 한기가 느껴진다. 이제와 기록도 없고 할머니를 만날 수도, 얘기 나눌 수도 없으니 역시 알 길도 없다. 그러나 할머니는 분명 존재하여 그 시절을 겪고 살아내었다. 내가 여기 숨 쉬고 있다는 게 그 명백한 증거가 된다.
결코 답을 알 수 없을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나의 할머니, 그녀의 삶은 어떠했을까? 할머니가 떠나시고 반세기 즈음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내 존재 안에 새겨져 이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소설 <밝은 밤>을 관통한 지금은 그녀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p.91) 나는 허블 망원경이 2003년에서 2004년 사이에 찍은 사진을 할머니에게 보여줬다. 천문학자들이 ‘울트라 디프 필드’라고 부르는 그 사진을. 오렌지빛, 보랏빛, 푸른빛, 흰빛을 내는 은하들이 검은 배경에 흩뿌려진 보석들처럼 보였다. “백삼십억 년 전 우주의 모습이에요.”
(p.130)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p.152) 나는 희자가 높은 하늘에 연을 띄우듯이, 기억이라는 바람으로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음에 띄워 올리곤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p.156)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p.252)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p.336)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이동한 비행체인 보이저 1호는 1977년 9월에 발사됐다. 지구를 떠난 그 비행체는..... 2004년 12월 태양계 가장자리인 헬리오스히스에 도달했다. 그리고 2012년에..... 성간 우주로 진입했다. 지금도 보이저 1호는 관성에 의해 중력과 마찰력이 거의 없는 우주공간을 미끄러지듯 이동하고 있다.
(p.337)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너무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