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의 초록책, 질 페이턴 월시, 134쪽 (사계절, 2010)
지구가 더는 생명이 살기 힘든 행성이 된다?
이런 상상은 환경이슈에 자주 언급되는 가정이다. 비슷한 소재로 수십 번 이야기와 영화가 만들어졌다. 중요하지만 자꾸 얘기하다 보니 식상할 수 있는 소재인데, 무려 십 년 전에 이를 전혀 다르게 풀어나간 동화책이 있었다.
동화 <패티의 초록책> 은 닥쳐올 재난을 걱정하기보다 지구를 벗어나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과정으로 이렇게 되었는가를 훅 뛰어넘는다. 그저 낯선 행성을 목적지로 한 마지막 탈출을 앞두고 급하게 짐을 꾸린다. 우주선의 연료와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가져갈 것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중 책은 한 사람당 한 권만이 허용된다.
주인공 가족은 아빠와 아이 셋으로 엄마는 일찍 세상을 뜬 것으로 나온다.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지구를 떠나며 다섯 살쯤 된 듯한 막내인 패티는 자기 몫으로 ‘초록책’을 고른다. 오빠 조는 <로빈슨 크루소>를 집어 들고, 언니 세라는 <조랑말 클럽 다시 말을 타다> 그리고 아빠는 <중급 기술 사전>이라는 두껍고 볼품없는 책을 고른다.
나라면 무슨 책을 고를까?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볼 상황이다. 한 권뿐이니 우선 오래 볼 수 있도록 두꺼워야겠다 싶지만, 읽고 또 읽어도 알쏭달쏭한 시집은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아무튼 안타깝게도 어린 패티가 고른, 옆면이 금박으로 반짝거리고 책갈피로 쓰는 비단 끈이 달린, 그 어여쁜 초록 책은…. 아무것도 안 쓰여 있었다. 비망록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수첩이었다. 이런 패티를 두고 언니 세라는 딱 한번 안타까움의 말을 내뱉는다. ‘아, 패티… 네가 좀 더 잘 골랐더라면…’.
그렇게 한 무리의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난다. 시간이 흘러 모두가 네 번의 생일을 지나서야 조그만 행성에 도착하게 된다. 새로운 정착지의 이름은 나이가 제일 어린 패티가 짓게 된다. 그 이름은 ‘샤인’, 투명하도록 반짝이는 붉은 행성이었다. 그곳은 구름이 없고, 바람도 없고, 수선화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소, 중력, 물이 있어서 살기 좋은 곳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처음엔 다른 생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p.58) 세라가 말했다. “구름 없이는 절대 비가 올 수 없어. 여기에 내리는 건 아마 이슬일 거야. 이슬이 내리는 거지. 나는 이게 더 좋아. 지구에 있을 때는 비 때문에 하루를 망치기도 했거든.”
사람들은 각자의 할 일을 맡고 서로 도우며 문명의 시작점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오두막을 짓고 가져온 씨앗으로 농사를 시도해 보기로 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 행성의 풀이나 나무는 퍽 이상했다. 겉모습은 지구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유난히 반짝이고 뾰족하며 쉽게 부서졌다. 애써 심은 지구의 밀알은 자라면서 행성의 식물들과 닮아간다. 작은 칼날 같은 싹. 잎은 유리처럼 바스러진다. 밀이 자라며 사람들의 두려움도 함께 커나간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은 없고 밀이 잘못되면 ‘알약’을 먹어야 한다.
밀이 익어가는 시간, 불안을 떨치기 위해 아빠는 다른 가족에게서 책을 빌려와 아이들에게 읽어준다.
(p.78) 아빠가 <깃털 세 개> 이야기를 읽을 때는 어느새 어른들까지 빙 둘러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많은 사람이 귀 기울여 들으면 책 읽는 소리가 더 커지고 또렷해지기라도 하는 듯, 아빠가 책을 읽어 나갈수록 사람들은 더 조용히 더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p.80) 안내자 아저씨가 아빠한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이지, 언제든 손만 뻗으면 읽을 수 있을 때는 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어요. 이제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 기억에서 사라질 테니 앞으로는 이야기 없이 살아가야 하겠죠. 없이 살아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아이들은 참으로 신비한 존재이다. 새로운 문명의 시작점에서 아이들은 꾸밈없는 그 눈과 마음으로 어른들이 고심하는 어려움을 해결한다. 달콤한 수액을 내는 나무를 찾아내고,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맞닥뜨리는 것도 모두 아이들이다. 낯선 생명체에게 손 내밀고 어울릴 수 있는 건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만 가능할 것이다.
또한 수확된 밀의 생김새를 보며 어른들이 고개를 저을 때도 아이들은 체념하지 않는다. 유리구슬 같은 밀알을 갈아 반죽을 만들어 굽는다. 이 동화의 마지막이자 절정에서 잠시 잊혔던 패티의 초록책이 나온다. 비어있는 공책이라 비웃음을 당했던 그 노트는 어느새 가득 채워져 있었다. 둥그렇고 삐뚤삐뚤하고 커다란 글씨들로….
(p.129) “이야기로군. 이곳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로군요. 나방 인간들 이야기와 육각형 밀 이야기예요!”
이제 새로운 행성에서 무해한 눈을 가진 아이들이 만드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패티의 초록책처럼 모든 아이들은 자신만의 빈 공책을 가지고 있을 거다. 텅 비었다거나 별 소용없다고 여겨지던 그 노트는 곧 빽빽하게 채워지는 날이 온다. 아이들은 자신만의 공책에 무엇을 쓸까? 주변에서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어른들을 관찰하며 시시콜콜하게 써내려 갈 것이다. 우리의 무심한 행동도 지금 그 노트에 기록되고 있지는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어른의 할 일은 어린이의 눈을 의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책을 덮으며 우리의 시작은 어린이였음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우리의 노트도 아직 빈자리가 꽤 남아 있다. 지구의 운명 역시 우리 곁에서 다르게 기록되길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