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짬이 행복해서
뚱땅뚱땅. 쿵쾅쿵쾅.
이렇게 시작된 소리는 오 년 가까이 흐르자….솔라솔솔솔올도미레도레도도도미솔라도레파라도레시라솔…..쇼팽의 즉흥환상곡으로 변했다.
*이미지 출처 :gettyimages.com
워니가 저녁 식사 후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기보다 이 닦기 싫어서 꾸물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싱크대 앞에 섰다. 저녁 설거지를 해야 한다. 개수대를 가득 채운 그릇을 보고 있자니 잠시 피로가 밀려든다. 에라 모르겠다며 누워서 티비나 틀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그렇지만 아이의 피아노 소리를 응원삼아 내 안의 게으름을 지그시 눌러본다. 무려 쇼팽을 들으며 설거지를 한다. 그릇도 내 팔도 음에 따라 나풀대는 듯하다.
요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두어 달 전부터, 워니가 집에서 틈틈이 피아노 연습을 했다. 할 일은 있지만 하기 싫을 때, 쉬고 싶을 때, 속상할 때 등 다양한 순간에 피아노 앞으로 숨는다. 주로 저녁밥을 먹고 나서 피아노 앞에 앉아 여러 곡을 연습하곤 했다. 그동안은 도통 집에서 피아노를 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의아하긴 했다. 지나가는 말로 ‘연습하는 거야? 집에서 피아노를 치니 엄마 귀가 호강하네.’ 했더니, 말로는 본인이 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다. 이제 진도가 많이 나가서 어려운 곡을 배우는데 선생님이 피아노 학원에서 치는 거로 부족하다, 집에서 꼭 연습하라고 신신당부했단다. 역시 선생님 말씀이 최고다.
비록 길지 않은 짬짬이 연주이지만, 그때마다 내 귀는 펄럭이듯 즐거워한다. 귀의 근육을 실제로 움직일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아이가 치는 곡은 그때마다 다르다. 터키행진곡(모차르트), 라 캄파넬라(리스트), 랩소디인블루(거슈인)… 최근에는 쇼팽의 강아지왈츠와 즉흥환상곡을 번갈아 치고 있다. 물론 클래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듯 완성도가 높은 건 아니다. 그래도 잠깐씩 매끄럽게 연주해내는 구간도 있다. 쇼팽이라니, 다시 되뇌어 봐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전엔 음악회 무대에서나 흘러나옴 직한 곡이라고 생각했다.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우승하던 감격스러운 순간도 떠오른다. 그런 음악을 열두 살 먹은 우리 집 애가 치고 있다니…
워니는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작년에 코로나로 인해 두 달쯤 쉬었던 것 말고는 꾸준히 갔다. 아니, 내가 보냈다. 중간에 힘들어하던 시기가 있었고, 투덜거리고 뺀질거리는 날도 있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고 아이 등을 떠밀었다. 이것만은 시켜야지 다짐해서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애가 투정을 부려도 달래서 보냈다.
워니는 그 순간들을 어떻게 기억할까? 엄마의 등쌀에 힘들었다고 할까 아니면 엄마 덕에 배웠다고 할까? 아니다, 그저 본인이 열심히 한 거라 생각할 듯하다. 그게 맞기도 하고. 훗날, 어릴 때 익힌 악기는 평생의 친구가 되리라는 내 나름의 큰 그림이 이루어질까 궁금해진다. 음악은 들으면서 즐길 수도 있지만, 직접 연주하는 기쁨을 누리길 바래본다.
아이의 스케줄을 짜고 매달 학원비를 내온 지 오 년 차이다. 그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우리 집 거실이 불시에 피아노 선율로 뒤덮일 때마다 보람이란 걸 조금 맛보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이 생동감이란 옷을 입고 변주된다.
나는 뭉클하고 감탄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우와 벌써 쇼팽을 치는 거야? 피아니스트 같네!
-엄마, 우리 학원 다니는 5학년들은 다 이거 쳐. 더 잘하는 애도 있는 걸.
-헉 그래? 요즘 애들 왜 이렇게 우월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