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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즈 Oct 16. 2021

내 안의 라임 오렌지나무

내 인생의 책 한 권

엄마는 쓸데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내가 가지고 싶다던 장난감이나 읽고 싶은 책 같은 게 당장 별로 쓸모가 없다는 뜻이었다. 학교에서 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없어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비쌌다.

가지고 싶었던 것 중에는 레고라 통칭하는 블록 장난감과 과학실험세트가 있었다. 역시 그 시절 엄마는 그것들의 쓸모를 의심했다. 내 눈에는 너무 근사해 보였지만 아이 용돈으로는 턱도 없었다. 가끔 완구점을 지나게 되면 그 앞에서 한참 구경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근처 서점 앞에서 서성대는 것도 좋아했다. 그 앞을 어슬렁거리거나 고개를 빼고 서점 안쪽을 들여다 볼 때면 책들이 바글바글하며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 같은 학교 친구 집에 놀러 갔던 날이 기억에 남아있다.

핑크빛 침구가 놓인 침대와 책장과 책상 세트는 색이 환하고 깔끔했다. 무엇보다 책장에 몇십 권은 됨직한 아동도서가 칸칸이 들어차 있었다. 난 그 쓸데없는 책들이 가지고 싶었다. 한동안 잠들기 전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서 그 방을 떠올렸다.


나도 누군가에게 얻거나 선물 받아  권의 책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  권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이다. 아껴서 읽다가 여러  읽다가 하며 한동안 곁에 두었다.    이사하며 잃어버렸는데 표지그림은 흐려질망정 잊히지 않는다. 책을 펼치면 구박을 받는 천덕꾸러기 주인공이 안쓰러워서 눈물이  돌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감성적인 아이였는데  내지 않고 지내려고 애썼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괜찮은 아이처럼 둔하고 조용한 아이처럼 보이려 했다. 왠지 진짜 속내를 들키면    같았다. 지레 알아줄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고 숨었던 걸까.  눈에 부모님은 바빴고  바빴다. 집안일을 하느라 밥벌이를 나가느라 전화를 하느라 이웃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텔레비전을 보느라 바빴다. 그래서 나도 바쁜 척을 했다. 학교에 가느라 숙제를 하느라 동네 아이들과 골목에서 뜀박질하느라. 카세트테이프를 빨리감기하는 것처럼 지나가는 나날에도 불쑥 이야기하고 싶고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떤 이야기인지도 모르면서.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일상을 물어보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랐다. 엄마에게 그런 다정함이 있었다면 나는 그리 이야기에 갈증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다정한 분위기가 더해졌다면 달랐을까. 어쩌면 어린아이란 항상 관심과 사랑에 목마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럴  책에 코를 박고  안의 헛헛함을 달래보았다. 제제의 눈으로 동네를 돌아다니고, 라임오렌지 나무 밍기뉴의 목소리를 들었다. 제제가 가족들에게 학대받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고 목이 조여오는  같았지만, 결코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제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아이에 비하면  일상은 안전하고 괜찮았기에. 기준점을 제제로 삼고 스스로 보호받고 있다고 위안 삼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안타까움과 안도감을 함께 느끼는 아리송함이 생각에 잠기게 했다. 뜨거운데 시원하고, 괜찮다 사양하며 받아들고, 마주 보고 웃었는데 뒤돌아 얼굴을 찌푸리는 어른의 수수께끼를   있을  같기도 했다.


훌쩍 시간이 흘러 나 역시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감성적이고 예민한 구석이 있지만 그걸 드러내진 않는다. 무던하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괜찮은 사람인 척하며 지낸다. 그 시절 엄마처럼 아침에 눈 떠서 잠들기 전까지 쓸모 있어 보이는 일을 하며 바쁘게 지낸다. 그러다 보면 문득 딴청 피우고 싶을 때가 있다. 내 안에 아직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목소리를 낸다. 별다른 이유 없이 돌아다니고 엉뚱한 상상을 하며 제제처럼 말썽을 피고 싶은 마음도 든다. 가만히 제제와 그동안 만났던 여러 친구를 떠올린다. 누구와 이야기를 해볼까. 내 집에는 서재로 쓰는 3평 남짓한 방이 있다. 한쪽 벽에 들어찬 책장 앞에 서면 칸을 나누어 꽉 차게 자리 잡은 남편과 나와 아이들의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사이좋게 자리를 잡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서로 펼쳐달라고 아우성이다. 하릴없이 책을 펼쳐 드는 그 시간이 좋다. 소설, 과학, 예술, 여행 등 들쭉날쭉한 분야의 도서들이 한데 섞여 있다. 각종 잡지도 의젓하게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일관성 없고 목적도 소용도 없는, 이 쓸데없이 많은 책이 모두 내 손 닿을 곳에 있다. 당장 어딘가 활용해야 하는 게 아니라서 좋다. 딱히 쓸데가 없는 거라 좋다.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제제처럼 그저 내 곁에 있어 주어 충분하다. 내가 쓸모가 아닌 존재만으로 기꺼워하는 어른이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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