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주택> 유은실 글, 비룡소 펴냄, 2021년 출간, 256쪽
<순례주택>(유은실 글, 비룡소 펴냄) 은 주택과 아파트, 빌라의 상이한 거주형태가 모여있는 동네에 살고 있는 여러 인물과 요즘의 세태를 십대의 시각으로 유쾌하게 풀어낸 이야기이다. <만국기 소년> 등 여러 편의 동화를 써온 유은실 작가의 청소년 소설이다.
제목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주택’이 아닌 ‘순례’이다.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다. 건물주인의 이름이다.
75세 김순례씨는 거북마을에 산다. 자신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라고 말하는 ‘건물주’이다. 요즘으로 치면 조물주보다 계급이 높겠다. 그는 세신사로 일하며 집을 마련했고, 도시개발계획으로 집의 일부가 도로에 편입되며 보상금을 받았다. 남은 자리에 세운 건물이 ‘순례주택’이다. 빨간 벽돌의 다세대 건물로 1층에는 주차장과 상가가 있고, 2층부터 4층까지는 층마다 두 세대씩 총 6가구가 산다.
거북마을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주한다. 나는 그 곳에 사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을 생생하게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유사한 거주 형태를 경험했던 탓이리라. 기억 속에 낮은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풍경이 남아있다. 그 동네에선 옆 집과 위아래 집은 물론이고 같은 골목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서로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집과 집을 오가며, 골목을 누비며 자랐다. 여름이면 현관문이 열려있는 집도 있었고, 건물 사이의 평상에서 옥수수와 수박을 나누어 먹는 소란스러움이 있었다. 아파트가 일색인 요즘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더구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 동네 사람들을 알기 어렵다. 이웃을 모르는 아이들은 어떤 표정을 보고, 무슨 소리를 들으며 자랄까?
여기에 순례주택에서 이웃들과 눈맞추며 자란 16세 오수림양이 있다. 가족은 길건너 아파트 원더그랜디움에 살고 있지만, 어쩌다보니 외할아버지의 여자친구인 순례씨 품에서 자랐다. 순례씨와 먹는 ‘해녀밥’을 좋아하며 자립심이 강한, 그야말로 ‘생활지능’이 높은 아이이다.
이야기는 줄곧 수림이의 시각에서 묘사되는데, 십대 특유의 짤막한 문장들이 눈길을 끈다. 툭툭 무심한듯 핵심을 찌르는 말로 부모와 독자에게 부끄러움과 즐거움을 상기시킨다. 고모들의 도움을 당연하게 여기는 아빠와 아파트 집값과 성적이 제일의 관심사인 엄마, 공부만 잘하는 손이 많이 가는 언니. 골치아프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가족의 행태가 웃음을 자아낸다. 어쩌면 우리집에도 있는 평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수림이네 집이 쫄딱 망하며 상황이 급변한다. 아파트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위기에 더 똑똑해진 수림이는 갈 곳 없는 가족들을 데리고 순례주택으로 이사를 온다. 문제는 사고뭉치 가족들이다. 거북마을을 빌라촌이라고 업신여기던 부모와 드라이클리닝 냄새를 좋아하는 언니가 순례주택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을까?
순례주택 이웃들과 어울리는 수림이가 되어 킥킥 웃다가 잠시 책을 덮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까?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나? 좋은 이웃과 진짜 어른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사람 냄새나는 유은실 작가의 신작 소설에 추천을 꾹 눌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