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구 건너편, 미지의 나라로
2018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5년 이상을 몸 담았던 첫 항공사를 그만두고 고국으로 돌아와 한국 사회와의 현실에 부딪혀야 했고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느 날처럼 캔디의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를 떠올리며 더욱더 내 삶에 충실하기로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이 필요했고 한국이 베이스인 여러 항공사의 문을 두드린 끝에 12윌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KLM 네덜란드 항공사로부터 합격 메일을 받았다.
1) 29세 카타르항공에 입사하다
사실 전 항공사에 대한 충성도와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29세 많은 주변 친구들이 이미 혼기가 늦었다며 서둘러 결혼을 하던 그 시점, 나는 남들의 시선과 풍습에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내적 불안감은 말도 할 수 없었으며 아니라고 고집 피우지만 그것이 맞는 것인지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내 삶은 내가 개척하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끌고 가고 싶다는 믿도 끝도 없는 믿음이 있었다. 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나는 27세 겨울을 시점으로 승무원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동터오는 첫 기차와 밤하늘 별을 보며 막차를 타고 대구-서울을 왕래하며 꿈을 향해 돌진했었다. 불안하지만 참 아름답고 열정적이던 젊은 날이었다. 카타르항공은 사실 승무원 준비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항공사였지 부끄럽지만 너무나 생소해서 지구 어딘가에 붙어 있는지 조차 모르는 무지한 상태였다. 그런 카타르항공에서 3번의 최종 면접의 기회가 있었다. 2번은 왜 떨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밤잠 못 이루고 이불 킥해가며 왜?라는 질문을 연신 해대었다. 이유는 명료했지만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관건이었고 합격의 열쇠였다. 포기하고 싶었다. 아직 20대 후반인데도 승무원이라는 환상의 꿈을 접지 못한다는 소리도 듣기 싫었고 자꾸 반복되는 실패에 자신감도 많이 결여돼 있었다. 그럴 때마다 혼자 집 앞 강변을 걸었고 라디오를 들었으며 책을 읽었다.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어려움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나만 가장 힘든 것 같은 세상에 갓 나온 햇병아리 20대의 방황과 두려움,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이 온 거 같아 그걸 내려놓을 수도 없었고 다른 걸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2012년 8월 드디어 1년 반 준비 기간 후에 합격 메일을 통보받았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눈물이 났고 행복했고 감사했다.
아직도 생생한 10년 전 이름도 생소한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던 날이 기억난다. 30킬로짜리 이민 가방을 4개나 싸느라 몇 날 며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가방 하나는 김치를 포함한 한국음식으로 꼼꼼히 무너지지 않게 채우느라 고군분투했다. 6개월은 돌아오지 못하기에 말 그대로 "이민"처럼 짐을 챙겨야 했다. 얼마나 무모하고 순진했나 싶다. 반년이라는 긴 시간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핑크빛 인생만이 기다릴 거라는 기대와 설렘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