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 인생 모범생의 첫 F 수령기
전형적인 K-장녀로, 31년간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나보다 더한 슈퍼K-장녀인 엄마 밑에서 항상 혼자서도 잘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무엇이든 빠르고 완벽하게 해냈다. 운도 따라주어서 좋은 대학에 갔고 무난한 성적으로 졸업해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넘쳤고 그들과 함께 매년 해외여행을 가거나 취미생활을 하며 재미나게 보냈다. 그렇게 크게 힘든 일도, 못하는 것도 없어 수우미양가로 치면 ‘수’, ABCDF로 치면 ‘A‘로 가득했던 삶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F‘를 받기 전까지는.
‘F419 상기 불명의 불안장애_상기 환자분은 21년 3월 불안, 긴장, 목조임, 과호흡, 가슴 답답함으로 내원하여 치료 중인 분으로 안정제 소량 사용하며 증상 완화는 되었으나 관해되지 않아 항우울제 조절 필요한 상태입니다. 귀원에서 진료 원하시어 의뢰드립니다. 이하 여백.‘
2021년 7월 6일,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받기 위해 받은 동네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료의뢰서에는 나의 지난 4개월이 간략히 적혀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체감한 우울, 불안, 강박, 신체화 증상으로 인한 고통에 비하면 너무도 간략해서 억울할 지경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많이 나아서 발병 이전의 90% 정도로 일상을 회복했지만, 그 당시는 인생에서 최악으로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 번도 갈 것이라고 생각 못했던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음 마주한 ‘F‘코드가 내게 미친 영향은 너무나도 컸다.
‘불안과 장애라는 말이 같이 붙어있는 게 말이 되나?‘, ‘한 번도 불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거의 나도 그랬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병이 그렇듯, 특히 정신질환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공황장애든, 강박장애든, 우울증이든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정말로 모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겪는 불안감이지만, 이것이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특정한 증상이 나타나고, 그것이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끼칠 정도가 되면 불안도 장애가 된다. 그 불안장애 때문에 만 8년을 넘게 다니던 회사를 처음으로 한 달 쉬었고, 매일 이유 없이 울었으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10kg이 넘게 빠졌다.
시작은 작년 11월이었다. 새로 발령받은 팀은 예전에 내가 있었던 곳이었는데 최악의 상사와 감당 못할 업무량 때문에 힘든 기억만 남아있는 곳이었다. 팀장은 바뀌어 그나마 나았지만, 과거에 비해 일은 배가 되어 있었다.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 업무량이 많다고 입사 이래 처음으로 말도 꺼내 보았지만 팀 사정 상 여의치 않아 나중에 조정해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문제는 내 성격이었다. 내가 맡은 모든 업무를 완벽히 파악해야 되고, 그에 맞춰 스케줄을 짜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해야 했다. 남들에게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원래 내 성격이 그랬다. 전임자도 외국으로 가버린 상황에서 수많은 자료들과 씨름하며 주어진 업무를 완벽히 다 파악했고,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있던 자료들도 다 정리했으며, 매일 체크리스트를 지워가며 수많은 업무들을 처리했다. 그렇게 특별한 성취감도 없이 당연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받은 엄청난 스트레스 역시 그와 동시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굳이 살펴주지 않은 어느 구석에서 스트레스는 점점 쌓여 나를 좀먹고 있었다.
올해 2월, 웬일인지 뭘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고 숨 쉬기가 답답했다. 원래 있던 만성 비염마저 말썽을 부렸다. 밥도 잘 먹지 못해 미치겠는데, 비염약을 먹으면 입과 목이 텁텁하게 말랐다. 맡고 있는 업무 중에서 가장 큰 행사를 10일 정도 앞둔 시점이라 극도로 예민해져 있어 몸이 안 좋아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빨리 나아야 했으므로 회사 근처의 내과에 짬을 내서 위내시경을 받으러 갔다. 그 와중에도 인터넷에서 본 수면 내시경 후기가 생각나 애플 워치로 잠에 들기 직전에 녹음 기능을 켰는데, 잠이 들고 내시경을 한 뒤 회복실에서 깨어나는데 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원래 수면 효과가 이렇게 짧았나 싶었지만 잠깐 자리를 비워서 마음이 급한가 보다 하고 회사로 다시 돌아왔다. 일을 하고 약속된 점심을 먹고 또다시 일을 하면서 야근까지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과 몸이 동시에 무너지는 듯한 피곤함은 둘째치고 이상하게 목에 뭔가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래인지, 다른 무언가가 목에 뭔가 걸린 듯 헛기침을 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내일 병원에 다시 가봐야지 하고 들지 않는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