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스알파 : 신체화 증상, 건강염려증, 공황발작, 우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목에 무언가가 걸리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아니, 두려워했다. 초등학생이던 언젠가 목에 밥알 찌꺼기가 걸린 적이 있었는데, 정말로 그때 죽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미술학원에서 집까지 엉엉 울면서 올라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정도니까. 남들이 보면 비웃겠지만 서른둘이 된 지금까지도 얘기한다. '생선 구이만 아니면 돼요. 가시 때문에.' 2021년 겨울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안 장애의 시작은 바로 그 '목에 걸린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다른 무언가 들을 주렁주렁 달고 왔다. 타지 생활 야무지게 해내며 단단히 다져왔다고 믿었던 내 멘탈은 연속으로 부딪혀오는 파도에 두꺼비 모래집 마냥 허물어졌다.
'목에 걸린 무언가'는 시작이었다. 초기에 먹었던 항히스타민제와 항불안제 때문인지 입과 목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침이 말랐다 수준이 아니라, 아무리 물을 먹어도 입 안이 사막처럼 타들어가는 정도를 의미한다. 마른입 때문에 자다가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목에 경련이 왔다. 그 이후로는 자는 것도 무서워졌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 3-4시까지 뜬 눈으로 지새우기 일쑤였으며, 어쩌다 잠들어도 곧 소스라치게 놀라며 깼다. 이렇게 예민하고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자 심장이 뛰었다. "심장은 당연히 뛰잖아!?"라고 반문할 당신에게 묻고 싶다. "매 순간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는 걸 느껴요?" 쿵쿵쿵쿵 심장을 쥐고 찧는 듯한 울림이 온몸을 지배했다. 어쩌다 갑작스럽게 큰 소리라도 듣게 되면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이 찡하게 아팠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곧 자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가슴을 움켜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숨을 쉬는 것도 낯설어져 가슴이 답답했고, 가끔씩 전기가 척추신경을 통하는 것처럼 치솟아 뒷머리가 당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제일 심각한 건 바로 소화기능이었다. 위와 장은 수많은 신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장 먼저 증상이 나타나는 장기 중 하나다. 불안장애가 발발하기 이전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밥을 못 먹고, 시험 당일 아침에는 과민성 대장증후군으로 설사를 하는 나였다. 처음에는 극도의 불안 때문에 입맛이 뚝 떨어져 밥이 넘어가지 않는 정도였다. 하루에 죽 두 세입으로 연명했는데,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뭔가를 먹을라 치면 등과 어깨가 찢어질 듯이 아팠고, 식도가 턱 막히는 느낌이 들며 구역질이 났다. 그렇게라도 먹고 난 후면 소화가 되지 않아 계속 기분 나쁜 트림이 올라왔고 몇 시간 내내 더부룩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불안장애로 인한 신체화 증상을 다른 말로 '자율신경실조증'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자율신경은 우리 몸의 전반적인 기능을 '자율적'으로 수행하는 신경을 뜻한다. 즉슨, 소화를 하고, 침이 나오고, 심장이 뛰는 등 생명과 직결된 본능적 부분이기 때문에 동시에 내 의식, 의지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말도 된다. 나는 그 자율신경과 관련된 모든 부분에서 크거나 작게 어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숨을 쉬는 것 마저도.
상기 증상들 때문에 약 한 달 동안 이비인후과 6곳, 신경정신과 2곳, 내과 1곳, 외과 1곳, 한의원 2곳까지 총 12군데 병원을 방문했다. 병원을 갈 때마다 이상이 없다고 하거나, 아주 경미한 증상만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예를 들어 목의 이물감 때문에 찾아간 이비인후과에서는 1)비염 때문인 것 같다거나, 2)편도결석 때문인 것 같다거나, 3)역류성 후두염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병명이길 간절히 바라며 약을 먹어도 낫지 않으면 바로 병원을 옮겼다. 그때마다 차라리 내가 큰 병에 걸려있었으면 했다. 갑상선 암이라던지, 편도에 아주 큰 혹이 생겼다던지,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던지. 하지만 갑상선 내시경, 후두 내시경, 피검사, 심장 엑스레이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그쯤 되자 오히려 병원에 가지 않으면 불안한 상태까지 이르렀다. 몇만 원이나 하는 후두 내시경을 받고 '아무 이상이 없다'라는 대답을 들으면 한두 시간은 증상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금세 다시 올라왔지만.
나는 분명 무언가 느껴지는데, 왜 저 사람들은 다 이상이 없다고 할까. 학계에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병에 내가 걸린 건 아닐까. 저이들이 일상에 안일해져 아주 깊은 곳에 숨어있는 혹을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닐까. 온갖 망상에 시달렸다. 끝에는 건강이 염려되지 않게 되었다. '이러다 죽으면 어쩌지?'가 아니라, '이러지 말고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공황발작은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 불안 증상을 이른다. 숨이 가쁘고, 심장이 마구 뛰고, 졸도할 것 같다거나, 전혀 딴 세상에 온 것 같고, 손발에 힘이 풀리는 등. 물론 공황발작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가 공황장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황발작이 주기적으로 오면서, 예기불안까지 겹치게 되면 공황장애 판정을 내리는데, 다행히도 나는 그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의 신체화 증상, 건강염려증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몇 번 공황발작을 겪은 적이 있다.
제일 심했던 적은 한 달 동안 회사를 쉬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날이었다. 한 달 동안이나 회사를 쉬었는데 다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 앞선 모든 힘들었던 일들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곳이 서울 내 집, 내 직장이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대기 시작했다. KTX를 타고 자리에 앉았다. '덜컹'하고 문이 닫히는 진동이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숨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복잡한 걱정들로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단숨에 정리되고 한 가지 생각만이 핵폭탄처럼 내 머릿속을 휘집었다. '나 죽을 것 같아.' 정신없이 객실을 빠져나가 연결 칸으로 가서 바깥을 보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풍경들이 오히려 나를 더 압도하면서 여기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미치게 만들었다. 다시 객실로 돌아가 정신과에서 처방받았던 비상 시약을 허겁지겁 먹었다. 엄마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쥐고 30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진정되었다. 정신과 약이 대단하면서도,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계속되자 단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나을 수 있을까?' 매 순간 나를 엄습하는 각종 증상들에 두려워하기도 지친 시점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무력감뿐이었다. 인터넷에는 나와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고, 있다 해도 그들은 완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차라리 공황장애라는 명확한 병명이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매번 다르게 처방되는 정신과 약도 싫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엄마는 네가 마음이 약해서, 네가 너무 예민해서라며 나를 타박했고, 10개월을 사귀었던 남자 친구는 내가 엄살을 부린다며 정신 차리라고 하고는 카톡+잠수 이별을 했다.
언젠가부터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이유가 있어서, 차라리 슬퍼서 나오는 눈물이라면 나을 텐데, 문제는 명확한 이유도 없다는 점이었다. 엄마랑 산책을 하다가도,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도, 친구에게 위로를 받다가도,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그냥 눈물이 났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울음 때문에 점점 마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어딘가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고, 무엇도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며 하루를 버티는 느낌이었다. 엄마와 함께 누워있던 어느 날 밤, 또 우는 나를 보며 엄마는 '네가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차라리 죽을병에 걸리면 좋겠다. 그럼 끝이라도 있잖아.'라고 답했다. 정말 필터를 거치지 않은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엄마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흘렸고, 그제야 나는 미안하다고 빌었지만 그 순간에도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안은 절대 혼자 오지 않는다. 그에 비해 기나긴 낮과 밤 동안 불안+α를 견뎌내야 하는 건 오직 나 혼자다. 조언을 해주고, 걱정을 해주고, 어느 순간 같이 있어줄 수는 있겠지만 내 마음속 불안과 두려움, 몸의 증상을 온전히 느끼고 함께 견뎌줄 수 있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나 대신 이를 겪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제 낫는다는 일체의 기약 없이 혼자 버텨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치도록, 감당할 수 없이 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