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됐고, 진단서나 하나 써 줘요

나는 나쁜 상담사

by 전민교

“매주 상담받고 싶어.”


첫 만남에 초기 평가를 마치고 빅토리아에게 2주에 한 번씩 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더니 그녀가 내게 한 말이다.


그녀는 적응장애*의 가벼운 증상을 보였고 약물치료도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적응장애: 갑작스럽거나 지속적인 삶의 변화나 스트레스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감정이나 행동에 문제가 생기는 상태


보험 기준상으로도 주 1회 상담은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다.


이유를 묻자, 지금 아이 셋과 머무는 바퀴벌레가 들끓는 임시정부 호텔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LA에는 정신질횐이 있는 저소득층들을 위한 주거지원 제도가 많다. 일정 기준이 충족되면 훨씬 더 저렴하게 혹은 아예 무료로 주거를 제공받을 수가 있다.


그 기준을 판단할 때 필요한 서류가 바로 일상 기능 손상 정도를 입증하는 정신질환 진단서이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지만, 안타깝게도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


딱히 아픈 건 아니지만, 방세가 너무 부담되다 보니 그야말로 ‘거짓 진단서’를 받아내 주거 혜택을 보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빅토리아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도, 나는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녀는 불만이 가득한 채, 상담실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두세 달쯤 지났을까. 예고 없이 빅토리아가 다시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주거 신청서가 들려 있었다.


“이제 써줘. 더는 못 살겠어.”


서류에는 ‘직장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의 심각한 정신질환’이라는 것을 입증해 달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나더러 적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얼마든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신청서에 쓰인 그 기준에 속하지 않았다.


“여기에 해당이 되지 않아 이 신청서를 적어줄 수가 없어. 대신, 싱글맘을 위한 다른 제도나 지원을 알아봐 줄게.”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격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넌 날 왜 안 도와? 정신 나간 미친놈들은 도와주고, 왜 나는 안 된다는 건데!”


“너무 힘든 상황인 건 알아. 하지만 이 클리닉에도 지켜야 할 규정이 있...”


그녀는 내 말을 끊고, 고함을 질렀다.


차분히 설명하려고 해도 듣지 않는 그녀에게 그만 욕하고 말았다.


“지금 당신, 내 말 안 듣고 있잖아, 시발! (You’re not fucking listening to me!”)


그녀는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나 역시 내가 저지른 말에 놀랐다.


곧바로 사과했다.

“욕해서 미안해. 그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네가 소리를 지른다고 상황이 바뀌진 않아. 이 서류는 내가 작성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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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각 장애가 있는 심리 상담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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