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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무지개 Oct 19. 2018

육아 2인조

엄마가되니 엄마가 더 애틋해졌다


  내가 처음 기억하는 엄마에 관한 기억은 엄마의 음성이다.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서 대관람차를 타고 높이 올라갔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아쉽게도 그 대관람차는 2012년 운행을 중지했다).


저 아래에 우리 집이 있어.

  당시 우리 집은 어린이대공원 근처였고, 나는 아직 돌이 되지 않았었다. 이것이 내 생애 첫 번째 기억이면서 엄마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이다. 그 이후에는 항상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시는 뒷모습만 거의 떠오른다. 음식 솜씨가 좋으셔서 난 항상 밥을 많이 먹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통통함을 유지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는 하교 후 자주 친구들과 우리 집에 와서 엄마가 해주시는 간식을 먹으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엄마가 해주시던 간식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감자도 삶아주시고, 떡볶이도 해 주시고, 너희 엄마가 해주시는 간식들이 참 맛있었어!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기억은 박경리의 『토지』를 한 권씩 사서 다 읽으셨던 모습이다. 전권이 총 20권 정도였으니 엄마의 책 읽는 모습을 꽤 오래 보았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책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 우리 부모님은 아빠의 고향으로 내려가셔서 자리를 잡으셨다. 아빠의 고향이지만 엄마도 중학교 시절을 보낸 곳이라 낯설지는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20살이 되자 생각지도 못하게 독립하게 되었다. 기숙사에도 살아보고, 친척 언니들과도 살아보고, 하숙집도 들어가 보고, 친구들과도 살아보고, 혼자서도 살아봤다. 하도 이사를 다녀서 내 주민등록 뒤가 변경된 주소지로 꽉 차게 될 정도였다. 이사는 매번 엄마와 나 둘이서 했다. 순식간에 이삿짐을 싸고, 옮기고, 풀고, 정리했다.


우리는 매우 손발이 잘 맞는 2인조였지만 엄마에 비하면 하는 일이 없어 보였다.
나는 엄마의 빠른 손놀림과 강인한 체력에 감탄을 하곤 했다.


  내가 혼자 서울 생활을 하니 때가 되면 올라오셔서 반찬거리를 냉장고에 넣어 주시고, 친구들과 함께 살 때는 한 박스씩 고구마를 보내 주시고(그때 밤마다 고구마를 구워 먹고 참을 수 없는 가스 방출로 인해 친구들과의 우정이 더 돈독해졌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먼지도 치워주셨다. 나는 엄마들은 다 이렇게 해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우리 엄마처럼 살뜰하게 딸을 챙겨주는 모습은 못 본 것 같다. 우리 외할머니는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엄마가 28살 때) 돌아가셨다. 엄마가 외할머니와 보낸 시간들이 너무 적어서, 애틋해서, 나한테 더 많은 애정을 쏟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외할머니의 사랑을 내가 대신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부모의 자식 사랑을 감히 자식이 흉내 낼 수도 없다. 아기를 낳고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아기를 낳고 산후 조리원에 들어갔다 온 2주, 시어머니께서 올라와서 아기와 나를 돌봐주신 4주의 시간 이후부터 우리 엄마는 매주 3박 4일을 서울에서 지내셨다. 진주에서 서울까지 손녀가 돌이 될 때까지 매주 오셨다.

사실 너무 힘드시니 오시지 마시라고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들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차마 목구멍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새벽에도 아기에게 분유를 먹여야 되니 첫 타임은 엄마가 주무시고 두 번째 타임은 내가 잠을 자는 식으로 교대로 아기에게 분유를 먹였다. 엄마와 나는 이삿짐 싸기 2인조에서 아기 키우는 2인조가 되었다. 나는 엄마가 도와주어도 힘든데 엄마는 도대체 혼자서 아이 둘을 어떻게 키우셨을까? 외할머니도 안 계시고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데 말이다. 나는 엄마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정말 이것보다 감사할 일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매주 서울을 오가던 어느 날 엄마의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갑자기 나와 길을 걸어가시다가 1초 정도 암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엄마 연세에 새벽에 잠을 편히 못 주무시고 매주 진주에서 서울까지를 왔다 갔다 하셨으니,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당연했다. 때마침 종합검진을 받으시는 시기가 와서 검진을 받고, 뇌 MRI를 찍으셨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고 과로 때문인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아기를 낳은 것은 나이고, 내가 힘든 것은 당연한데
엄마까지 힘들게 하는 것이 맞나 싶었다.


  내 기억에 우리 엄마는 아프신 적이 없다. 아파서 누워 계신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픈 것은 항상 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침이 오래가고, 체하시거나 감기 기운이 있으신 날들이 생기면서 ‘엄마도 나이가 드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엄마는 밤에 푹 주무시도록 했다. 머무시는 기간도 3박 4일에서 2박 3일로 줄이고, 2주에 한 번씩 오시는 것으로 바꿔나갔다. 두 돌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엄마는 자주 오신다. 우리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한 가득 싸가지 고는 힘든 기색 하나 없으시다. 이제는 손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오랫동안 서울에 오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다.

우리 아기도 이렇게 사랑 많은 할머니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엄마와의 해외여행이었다. 다행히도 결혼 전에 그 목표는 달성했다. 지금은 또 다른 버킷리스트가 생겼다. 엄마와 나 그리고 우리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서 셋이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앞으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더 많이 남기는 것이다. 희미해지는 기억은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해 놓고, 앞으로 만드는 기억도 부지런히 보관해 놓고 싶다.


나에게 우리 엄마는 해결사고, 나의 수호천사고, 베스트 프렌드다. 나도 우리 아기에게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책으로도 만나보세요!!!

http://naver.me/56Izi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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