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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무지개 Feb 13. 2019

치느님에게 작별을 고하다

인간을 위해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것은 없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학교 정문 앞에서 병아리를 파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곤 했다. 나는 너무나도 귀여운 병아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두 마리를 사들고 집으로 갔었다. 커다란 박스 안을 솜으로 반을 채우고 병아리들을 넣어주니 엄마 품인 마냥 솜 안으로 파고들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후 병아리들은 급속도로 성장을 했고 다행히 우리 집은 주택이었기에 뒷 베란다에 닭장을 마련하여 병아리가 닭이 될 때까지 키울 수 있었다. 닭장 문을 항상 열어 놓았었더니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새처럼 날아 나뭇가지에 올라가 앉아있기도 하였다. 그래 너희들도 날개가 있었지.... 그리고 같이 사는 식구를 아는지 이름을 부르면 집 밖에 나가 놀다가도 종종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그리던 어느 날 방과 후 집에 왔는데 닭장이 텅 비어있었다.

  -엄마, 닭들은 어디 갔어요?

  -응, 이제 너무 커서 집에서는 못 키울 것 같아서 더 잘 키워주실 수 있는 분에게 드렸어.


   나는 작별 인사도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더 넓은 곳에서 친구들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을 토닥였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엄마가 커밍아웃을 하셨다. 그때 우리 집 닭들을 아랫집 할머니가 잡아서 삼계탕을 해 드셨다는 것이었다. 띠로리~~

  10여 년만에 밝혀진 비밀로 한동안 신해철의 <날아라 병아리>라는 곡을 들으며 작은 병아리에서 닭으로 성장했던 우리 집 닭들을 추모했었다. 하지만 얄리(날아라 병아리 곡에서 나오는 병아리 이름)는 얄리고 치킨은 치킨이었다. 얄리를 추모하면서도 나는 치킨을 먹었다. 이름이 없는 수많은 닭들은 그저 나에게 맛있는 치킨들이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 맞은편 건물에는 치킨집이 있다. 바로 옆 건물에도 치킨집이 있다. 그리고 그 치킨집 길 건너 맞은편 건물에도 치킨집이 있다. 또 그 치킨집의 오른쪽 횡단보도 건너편에도 치킨칩이 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치킨집 뒤로 나있는 길가의 건물에도 치킨집이 있다. 이렇게 치킨집을 연결하다 보면 전국일주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는 치킨왕국이라 불릴만하다. 오죽하면 치느님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그런데 이 많은 치킨집에서 튀겨지는 닭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길러졌을까? 궁금해졌다. 아마 우리는 치킨을 영접하느라 바쁠 뿐 닭의 일생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더욱이 식탁에 놓인 요리와 실제 닭과 연결을 지어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먹거리에 대한 고민도 많아진 상태에서 계란 살충제 파동(얼마 전에는 항생제까지 문제 제기되었다)까지 발생하면서 가축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비용의 최소화와 생산성 극대화를 추구하는 공장식 축산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공장식 축산에서 사육되는 닭들은 자기 몸에 꼭 맞는 케이지 안에서 평생을 산다. 비위생적 공간에서 살다 보니 각종 질병을 얻게 되고 이것을 막고자 항생제와 살충제가 사용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AI(조류독감)가 자주 발생하게 되고 AI가 발생하게 되면 살아있는 닭들을 살처분하게 된다. 살처분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홀로코스트가 따로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학대하다가 수명보다 빨리 죽이거나 생매장하는 셈이다. 정부는 축산업 진흥을 위해 공장식 축산을 지원했고 사람들이 더 많은 고기를 소비하도록 하였다. 우리가 먹는 치킨들은 이런 공장식 축산으로 학대받으며 길러진 닭이다.


생명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도 끔찍하고,
더불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고통받은
닭과 달걀을 먹는 사람도 과연 건강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닭뿐만 아니다 돼지, 소, 오리 등 공장식 축산이 수많은 질병을 만들어내고 불러들이는 문고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다. 값싼 제을 소비하겠다는 우리의 욕망이 결국 새로운 인수공통 전염병을 만들고 그로 인한 피해는 우리가 받게 된다.(인용 1)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만 해도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았는가.


   인간은 모든 종의 최상위 집단이 아니다. 모든 종과 나란히 놓여 있어야 한다. 인간의 자유가 중요하듯 동물들의 자유도 중요하다. 내 아이의 그림책에서 모든 동물들은 친구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배고프고 기쁘고 슬프고 아픔을 느낀다. 어린아이들이 발도 편하게 딛힐 수 없는 케이지에 갇힌 닭과 움직이지도 제대로 눕지도 못하는 스톨에 갇힌 돼지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한치의 망설임 없이 도와줘야 한다고 할 것이다.  

   나는 고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고기를 먹어야 하나 의문이 든다. 정부나 공장식 축산업자들은 소비량이 많으니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동물복지를 실현하게 하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고기 소비를 줄이고 고기를 먹더라도 자연친화적으로 생산된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공장식 축산물에 대한 소비를 하지 않고 싶어 졌다. 하지만 고기뿐만 아니라 달걀, 우유까지 생각하다 보면 외식은 물론이거니와 가공식품도 살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런 끔찍한 상황을 알면서도 불편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예전처럼 소비를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선 치느님과 작별하기로 했다. 아마 1년에 20마리 정도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물복지 마크를 확인하고 고기를 소비하기로 했다. 또 되도록이면 고기를 적게 먹기로 했다. 평소에 많이 먹는 편이었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서도 줄여야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키웠던 닭들을 생각해보면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과 교류도 가능한 영리한 동물이었다. 그들도 먹고, 자고, 놀고, 고통받고 싶지 않은 본능적 욕구를 지닌 생명들이었다.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치킨집의 닭들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 매일 동물들이 나오는 그림책을 읽어주며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지 못했다면 동물들의 죽음이 인간을 위한 당연히 죽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또 내 친구 얄리를 다시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인간을 위해 당연히 존재해야 되는 것들은 없다. 소, 돼지, 닭도 마찬가지다.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은 결국 사람한테도 적용된다. 아니 이미 적용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알고 있다. 얼마 전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을 다룬 다큐멘터리 <잡식가족의 딜레마>의 감독이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펴낸 <사랑할까? 먹을까?>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또는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은 동물복지 돼지 농장을 겨우 찾아내서 방문하게 된다. 그 돼지 농장의 주인이 한 말이 내 마음속에 콕 박혔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만물이 하나로 연결된 순환의 고리,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귀하게 대하고 모든 것에 친절하라



  (인용 1)

 『사랑할까? 먹을까?』, 황윤,  휴, p202


책으로도 만나보세요!!!

http://naver.me/56Izi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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