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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무지개 Feb 25. 2019

세 번의 죽음

아이를 낳고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아이의 죽음이었다.

   방문 사이로 보인 죽은 몸은 마치 딱딱한 통나무처럼 보였다. 아침에 쓰러지신 할머니는 그 날을 넘기시지 못하고 할머니 방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며칠 전만 해도 할머니의 콜라를 다 마셔버린 동생에게 눈을 흘기셨는데, 아무 말씀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난생 처음으로 죽음을 눈 앞에서 보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몸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할머니는 엄마의 고모였고 자식이 없으셨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엄마가 어렸을  때 고모 집으로 가게 되었고 몇 년을 함께 살았다고 했다. 엄마가 떠난 후로도 할머니는 엄마를 처럼 여기셨고 엄마도 일찍 돌아가신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로 채우시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살았고 할머니는 경상남도 남지라는 곳에 사셨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재산을 다 정리하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그렇게 오신지 일주일도 안되셨는데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계셨던 걸까?  

  8년 전 동생은 우리 가족 곁을 떠났다. 동생은 아직 3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3개월 시한부를 선고를 받았다. 암세포가 복부 전반에 퍼져 수술조차 할 수 없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것이다. 미련하게 자기 아픈 것도 모르고 이 상태가 되도록 있었다니, 동생이 미웠다. 너무 슬퍼서 미웠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우리는 희망의 끊을 놓지 않았었다. 이곳저곳에서 암을 이겨낸 다양한 사례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1여 년 만에 희망으로 끝나버렸다. 동생은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고 강한 모르핀 투여로 온전한 정신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적어졌다. 차라리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히 쉬길바랬다. 동생의 마지막 의지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몸은 죽음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추운 겨울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에 동생은 우리 가족 곁을 떠났다. 동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영혼의 눈물, 말로는 못하는 작별의 눈물이었겠지.


  시간은 나를 위로해 주었고 죽음에 대해 점점 더 무뎌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죽음은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찾아왔다. 이전의 죽음들이 슬픔이었다면 이번은 공포로 다가왔다. 아기를 낳고 처음 집으로 데려왔을 때, 나는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살얼음을 위를 한 발 자국씩 내딛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 불덩이를 내려놓게 되면 불덩이도 얼음도 다 사라질 것 같았다.



  내가 아기를 낳고 가장 두려웠던 것은 힘든 육아생활도, 늘어난 뱃살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기의 죽음이었다.



   아기가 탄생하자마자 죽음이라니...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될지는 상상도 못 했었다. 너무나도 작고 예쁜 나의 아기가 죽는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치 죽음에 대한 예행연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럴 때면 온몸이 떨리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고 식은땀이 났다. 한시라도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와 아기의 행복한 시간을 질투라도 하는 듯이 나쁜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또다시 어두운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아기가 죽을까 봐 두려웠다. 아기가 죽은 상황이 자꾸 머릿속에 그려진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몇 달 동안 지속되었고, 상담이라도 받아봐야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기 돌보느라 내 몸 추스르기도 힘들었던 시기에 내 마음까지 돌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안한 감정을 붙잡으며 하루하루를 견디어냈다.

  프로이트의 저서 중 삶의 본능(에로스)과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안한 [쾌락 원칙을 넘어서]라는 책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의 정신에서 껍질처럼 의식이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의식은 외부로부터 너무 강력한 자극이 들어오면 정신이 손상되지 않도록 자극의 강도를 낮추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신이 이렇게 자극적인 에너지가 없는 상태를 원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정신은 ‘자극이 전혀 없는 무기물의 상태’ 같은 것을 동경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즉 어떤 긴장도 없는 죽음의 상태가 정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죽음을 향한 정신의 이 충동(타나토스)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자극을 더욱더 비자극적인 표상으로 반복해서 바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의식의 과제인 것이다.(인용1)


  프로이트에 이론에 근거해서 생각해보면, 아기가 탄생한 처음 몇 달간은 행복감이 극도의 쾌락(에로스)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평온했던 내 무의식이 과대한 에너지로 넘실대기 시작했고, 이에 나의 의식이 죽음(타나토스)이라는 표상을 만들어 그 에너지를 낮추는 작동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아기와의 생활이 일상이 되고, 행복의 감정이 일상화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점차 사라져 갔다. 나의 무의식이 다시 평온을 되찾아가면서 에너지를 낮추려는 의식의 활동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우리에게는 '신비스러운 자기학대적 성향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내 상황을 말하는 것인 것 같았다. 내가 제대로 프로이트가 말한 개념을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세 번의 죽음을 겪으며 나는 죽음이 삶과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죽음을 마주하며 사는 삶이 나쁘지만은 않다. 우선은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또 헛된 욕심을 자제할 수 있다. 그리고 정리되는 삶을 살아가게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동안은 네 번째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용1) 네이버 지식백과, 사랑과 죽음은 상통하는가? - 에로스와 타나토스, 생활 속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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