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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민 라이트랩 Aug 21. 2020

검은 스케치북을 쓰면 보이는 것들

빛을 그린다는 것



우리는 하얀 배경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익숙하다. 하얀색 도화지나 캔버스 위에 검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한다. 그림을 그리는 이러한 방식은 매우 효율적이고 익숙하지만, 우리가 대상과 장면을 인지하는 데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되도록 만들기 쉽다. 



그동안 이야기해온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빛이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얀색 도화지는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벽면이나 바닥도, 그로 인한 작은 그림자도 없는 빛의 공간. 그런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빛의 부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연필이든, 어떤 색의 물감이든 그 위에 무엇을 그린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어두움을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밝은 부분은 하얀색 종이 그대로 남아있도록 최대한 손대지 않아야 하며, 어두운 부분은 가장 많이 손대고 그려야 하는 부분이다.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빛의 부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와는 반대로 검은색 스케치북은 아무 빛이 없는 캄캄한 방과 같다. 이곳에서는 벌어지는 모든 그림의 행위는 '빛을 그리는' 것이다. 내 하얀색 색연필이 닿는 곳은 공간 혹은 사물 가운데 빛나는 부분이다.  마치 공허한 암흑에서 빛을 창조하는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밝은 곳은 더 많이 칠하고, 가장 어두운 곳은 칠하지 않고 놔두게 된다.



검은색 스케치북을 사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빛을 그린다’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사물을 그린다면 조명이 어디에 있을 때 이 물체의 어디가 더 빛나게 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전에는 그냥 놔두었던 하얀색 벽면과 천장면은 이제는 칠해야만 하는 대상이 된다. 천장과 벽면 중 어디가 더 밝은지, 같은 벽면 중에서도 창가 쪽이 더 밝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색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조명이 어떠한가가 이제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천장의 주광색 조명인지, 스탠드의 전구색 조명인지에 따라 칠해야 하는 벽과 바닥의 색이 달라진다. 사물을 그릴 때는 빛이 가장 많이 닿아 가장 선명한 빛을 내는 곳일수록 원색의 색연필을 사용해 그리며, 어두운 곳은 채도가 낮은 색연필을 사용해야 한다. 



빛의 밝기와 형태에 따라서도 그림은 달라진다. 눈에 보이는 매입 등은 온 힘을 다해 하얀색 색연필로 가득 채워 밝게 만들어야 하고, 우물천장 속 간접조명과 침대 밑의 간접조명은 힘을 빼고 살살 흩뿌려지는 조명을 표현해야 한다. 광택이 있어 하이라이트에 반짝이는 점이 있다면, 색과 관계없이 하얀색 점을 찍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색연필의 하얀색은 한계가 있으니 하얀색 수성 볼펜을 사용하면 효과가 더욱 좋다.)



하얀색 도화지에 나의 공간을 그린다면, 우리는 공간을 구성하는 ‘물체’와 ‘형태’에 집중하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 색을 칠할 때도, 물체가 가진 색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 세계에는 우리의 눈과 그리고자 하는 대상만이 고려되기 쉽다. 하지만 검은색 도화지는 우리로 하여금 마치 캄캄한 방에 불을 켜 사물을 보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이라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이는 각 객체로써의 사물이 아니라 공간과 빛 안에서의 사물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며, 실제로 우리가 생활하고 인지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검은색 도화지는 우리로 하여금 마치 캄캄한 방에 불을 켜 사물을 보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이라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노인과 계단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 자체를 그리고 싶었던 걸까



나에게 있어 렘브란트의 그림이 대단한 이유는 그가 그 이전의 누구보다 그림을 그림에 있어 그리고자 하는 ‘대상’보다 대상을 비추는 ‘빛’ 자체를 그린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의 그림이 그리고자 하는 인물, 공간, 사물 등 각 개체를 중심으로 그려졌다면, 렘브란트는 그 공간에 존재하는 빛을 그렸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전반적으로 어두운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 빛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렘브란트의 거의 모든 그림들은 어디서 빛이 오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그 빛의 존재가 그림 속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인물과 공간과 사물은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에 더 가깝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기에는 하얀색 바탕보다 마치 검은 도화지처럼 어두운 배경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색 위에도 더 밝은 색으로 덧바를 수 있는 오일페인팅의 특징은 렘브란트 같은 화가들로 하여금 보다 빛 자체를 그리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내 기준으로는 렘브란트야 말로 훌륭한 조명디자이너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나는 이따금씩 렘브란트의 눈을 가졌다고 상상해본다. 렘브란트라면 내가 보고 있는 이 장면을 어떻게 그렸을까? 아마도 그는 빛은 어디에서 오고 있으며 그 빛은 어디를 먼저 비추고 반사되어 어디로 향하는가를 먼저 살펴보았을 것이다. 같은 색의 사물 안에서도 빛의 방향에 따라 밝고 어두움이 나뉘는 모습을 나누어 보게 된다. 반사되어 공간 구석구석 퍼지는 빛을 바라보고, 그림자와 빛이 닿지 않는 곳들도 꼼꼼히 살펴보았을 것이다. 내 기준으로 렘브란트야말로 훌륭한 조명 디자이너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빛은 사물 또는 공간과 별도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빛은 공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이어주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묶어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다. 하얀색 도화지에서 어두움을 그리고, 각각의 사물을 독립적으로 생각했다면, 검은 도화지는 공간 속에서 다양한 사물들과 상호작용하는 빛 자체를 보게 만든다. 만약 그림을 그리기를 즐긴다면 한 번쯤은 검은 도화지를 마련해 '빛을 그리는' 렘브란트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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