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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민 라이트랩 Mar 06. 2020

빛에도 형태가 있다

빛과 삶에 대한 이야기 (8)


산업디자인과를 다니던 대학 시절, 학생들의 모임에서 펜던트 조명을 디자인하기로 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멋지고 다양한 펜던트 조명 사례를 조사했다. 멋진 비례감, 유연한 곡선, 기가 막힌 컬러와 재질까지 조명기구 형태의 세계는 참 다양했다. 학생들은 저마다 갈고닦은 멋진 스케치 실력을 뽐내며 다양한 형태의 조명기구를 디자인했다.



우리는 그렇게 스케치된 다양한 조형의 조명들을 한쪽 벽에 붙여놓고서 서로의 디자인을 봐주곤 했다. 사용되는 공간에 더 필요한 형태는 어떤 것일까를 함께 고민했고, 개중 조금 더 경험이 많은 선배는 재료에 따른 가공, 제조방식에 따른 보다 나은 디자인을 제안해주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우리의 열정은 대단했으나, 당시의 우리는 필요했던 것의 반만 디자인했고, 다른 반은 완전히 놓쳐버리고 있었음을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조명설계회사 사무실의 한쪽에는 사무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의 많은 책이 꼽혀있었다. 그중 가장 많이 꺼내본 것은 각 조명회사의 카탈로그였는데, 내용 중에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 사진으로 봐서는 똑같은 형태의 조명이 여러 페이지에 각기 다른 제품번호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앞뒤 페이지를 번갈아 가며 넘겨보면서 마치 틀린 그림 찾기라도 하듯 이미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정확하게 같은 형태의 제품이었다.



오래지 않아 알게 된 사실은 각 조명이 만들어내는 빛의 형태와 각도, 안에 넣을 수 있는 램프의 종류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제품으로 표기 및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조명기구에서 조명기구의 형태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명이 가진 빛의 형태와 광량이다.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더라도 어떤 빛을 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제품이 된다.




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더라도 어떤 빛을 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제품이 된다




빛에도 형태가 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빛이란 존재 자체는 형태가 없다. 하지만 각 조명기구는 그 형태와 목적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빛이 퍼지도록 설계된다. 광원으로부터 나온 빛이 공간에서 어떠한 분포로 퍼지는가, 이를 전문 용어로 배광(Light distribution)이라 한다. 이 배광 정보를 2차원 혹은 3차원의 선으로 표현한 것을 배광곡선이라고 한다.



모든 광원 또는 조명기구는 각자의 배광을 가지고 있다. 배광은 빛이 퍼지는 각도가 넓고 좁은 정도를 나타내는 조사각뿐만 아니라 빛이 사방으로 퍼지는지, 위아래로 퍼지는지, 퍼지는 빛의 비율과 형태는 어떠한지는 조명기구가 가진 근본적인 역할 즉 어떤 빛을 만들어내느냐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조명설계에서는 구체적인 수치로 3D 데이터화 된 배광 데이터를 다루며, 이를 통해 가상의 공간에 조명 시뮬레이션과 조도 계산 등이 가능하도록 한다.




할로겐 타입의 LED램프 배광 데이터. 빛의 각도에 따른 광량 그에 따른 조도 등을 알 수 있다. (출처:필립스)



동그랗고 넓게 퍼지는 형태의 배광곡선이 있는가 하면, 세로로 뾰족한 형태의 타원을 가진 배광곡선도 있다. 넓은 형태는 빛 자체가 넓게 퍼지는 형태라는 것을 의미하며, 뾰족한 형태는 흔히 말하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좁은 각도로 강한 빛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조명은 방향은 아래를 향하고 있으나 각도가 틀어져 빛이 나가는 형태의 배광을 가진 조명도 있다. 마치 8자처럼 상하부 동시에 빛이 나가는 조명도 있으며  좌우로만 퍼지는 조명, 혹은 각각의 요소가 혼합되면서 방향별로 나가는 빛의 양의 비율이 각기 다른 조명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비싼 가격의 펜던트 조명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어두운 음식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빛의 형태에 대한 개념은 조명설계 전문가나 조명기구 디자이너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식탁 위의 펜던트를 고를 때 쉽게 조명기구의 형태만을 따지게 되기 쉽다. 그 조명이 어떠한 형태의 빛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의 광량을 보내고 있는지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비싼 가격의 펜던트 조명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어두운 음식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양한 조명기구의 배광


식탁 위의 펜던트 조명, 거실 한편의 플로어 스탠드 조명, 침실 옆 작은 스탠드 조명에 이르기까지 각 조명은 각자의 배광을 가지고 있다. 위의 여섯 가지 사례 말고도 무수히 많은 배광의 사례들이 존재한다. 좋은 조명을 고르기 위해 필요한 첫 단계는 어떤 디자인의 조명이 필요한 것인가 보다, 어떠한 빛이 필요한 것인가에 있다. 공간을 비출 것인지, 특정한 부분을 비출 것인지, 은은한 빛이 필요한지, 포인트 되는 빛이 필요한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빛을 천장 조명으로 만들어줄 것인지, 펜던트 혹은 스탠드, 아니면 바닥 조명으로 만드는 것이 좋은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빛의 형태를 바탕으로 '어떻게 비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좋은 조명을 고르는 첫걸음이다.



이와 같이 빛의 형태를 바탕으로 '어떻게 비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좋은 조명을 고르는 첫걸음이다.




그러한 마음으로 좋은 빛을 고민했다면 이제는 조명기구를 보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같은 형태의 조명이라도 빛을 차단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조명과 빛을 투과시키는 유리 혹은 아크릴 계열의 재료로 만들어진 조명은 다른 빛의 형태를 지닌다. 혹은 너무 마음에 드는 형태라 할지라도 원하는 빛을 만들기에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도 되고, 형태는 무난하지만 빛만큼은 나에게 꼭 맞는 조명이라는 생각도 들게 될 것이다. 



조명기구의 재료와 형태는 모두 빛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로부터 시작되었어야 했다. 그것은 조명을 고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것이었지만 조명기구를 디자인하겠다던 대학생 시절의 나에게는 더더욱 필요한 개념이었다. 보기에 멋진 조명기구는 자연광이 드는 낮시간 멋진 조형 오브제로서의 역할은 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좋은 빛을 만들기는 부족한 제품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단순한 원기둥의 형태라도 수많은 배광의 조명이 가능하다. 원기둥 각 면을 어떤 재질로 만드느냐와 반사판을 어떻게 설치하느냐에 따라 조명의 상하부 및 측면으로 퍼져나가는 빛을 각각 다르게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조명기구의 내측, 외측의 컬러와 표면의 패턴, 광택에 따라 빛은 또 다른 형태를 같게 된다. 또한 같은 조명기구라도 어떤 램프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빛의 형태와 색이 달라질 수 있으니, 그것만 해도 조명기구 디자인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조명기구를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빛 역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공간에서는 그러한 다양한 형태의 빛들이 함께 존재한다. 식탁 위를 밝히는 빛, 벽을 밝히는 빛, 책상 위를 밝히는 빛, 공간 전체를 밝히는 빛 등. 조명기구가 가진 겉모습을 너머 그 각기 다른 조명기구나 만들어내는 빛의 형태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더불어 나에게 필요한 빛의 형태는 어떤 것인 필요한지 고민하면서 공간에 빛을 채워나갈 때, 우리의 공간은 보다 좋은 빛으로 풍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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