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삶에 대한 이야기 (9)
수채화를 배우던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다. 정물대 위에는 하얀 석고상을 포함해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베이지색의 테이블 보 위, 빨간색 사과와 노란색 주전자, 초록색 맥주캔과 하얀 석고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 정물들을 한 장의 그림 안에 그리기 시작했다. 하얀 석고상은 무채색으로, 빨간색 사과는 빨간색 물감으로, 노란색 주전자는 노란색물감으로, 그렇게 각자의 색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그림을 봐주러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내 그림 앞에 앉아 팔레트와 붓을 드시더니 하얀색 석고 그림에 묽게 섞은 빨간색 물감을 턱 하고 찍으셨다. 내 눈은 동그래졌다. 베이지 테이블보에는 캔의 초록색이, 노란색 주전자에는 다시 사과의 빨간색이 칠해졌다. 아니 , 노란색 주전자에 빨간색 물감이라니, 빨간색 사과에 초록색 물감이라니...! 선생님의 과감한 붓질에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선생님은 씨익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다.
“물체의 색은 서로에게 묻게 되어 있어.”
사실 당시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야 그림이 조화롭게 보이나 보다’ 정도로 이해하고, 그 뒤로는 공식처럼 서로의 색을 조금씩 각자의 정물에 묻혀 그림을 완성시켰다. 그 말이 이해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벽의 컬러를 고를 때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색상일 수도 있고, 가구와의 조화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바탕면을 만들기 위해 무난한 색을 고르는 경우도 있으며, 평범함을 피하고자 나만의 독특한 색을 고르는 경우도 있다. 벽지라면 색의 종류에 한계가 있을지 모르지만, 도장으로 넘어갈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색의 범위는 훨씬 넓어진다. (심지어 화이트를 고르려 한다 할지라도 수십 가지 화이트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다면 빛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벽은 무슨 색으로 해야 할까.
물체는 받아들인 빛의 일부를 흡수하고, 일부를 반사한다. 물체의 색이라 함은 어떤 빛을 얼마큼 흡수하고, 어떤 빛을 얼마큼 반사하느냐를 결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빛이라는 물감] 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얀색의 빛은 대부분 거의 모든 색상의 빛을 품고 있는 팔레트와 같다. 이 빛이 하얀색을 반사하는 표면을 만나면 대부분의 빛을 반사시킨다. 만약 빨간색을 반사시키는 표면을 만나면, 다른 대부분의 빛은 흡수하고 빨간색의 빛만을 반사시키게 된다. 검은색의 표면을 만나면 이 표면은 가시광선의 대부분의 빛을 흡수한다.
조명은 이 효과를 이용한다. 램프에서 나오는 빛은 하얀색 한 가지라도, 조명기구 안쪽을 어떤 색으로 하느냐에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빛과 위로 올라가는 빛의 색 차이를 줄 수 있다. 집이라는 공간도 하나의 큰 조명기구와 다르지 않다. 큰 반구가 집의 벽과 천장이며, 그 안에 창문 또는 조명기구가 배치되어 있다. 창으로 들어온 태양빛은 공간의 바닥과 벽을 맞고 흡수되며 또 반사된다. 벽과 바닥의 색은 공간 안에서 어떤 빛을 흡수시키고, 어떤 빛을 반사시킬 것인가 설정하는 것과 같다.
집이라는 공간도 하나의 큰 조명기구와 다르지 않다.
벽의 색을 결정한다는 것은, 단지 벽 한 면의 색이 달라지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빛은 공간에서 서로 반사하며 자신의 색상을 공간과 다른 물체들에 '묻는'다. 핑크색 벽면 앞 하얀색 화병은 옅은 핑크빛을 띠게 된다. 공간에 반드시 핑크, 노랑, 파란색 조명을 사용해야 색감이 있는 빛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벽면에 색을 입힙으로써 우리는 공간에 그 빛을 사용하게 된다.
벽면에 색을 입힙으로써 우리는 공간에 그 빛을 사용하게 된다.
실내 대부분의 벽과 천장의 색이 하얀색일 때 누릴 수 있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밖에서, 혹은 실내의 인공조명을 가장 많이 반사해 최대한 실내에 많은 빛이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광원의 색을 최대한 그대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하얀색이 가장 좋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면의 색이 필요한 경우는 이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공간에 빛이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 빛의 강약을 조절해 줄 필요가 있다. 특히 창과 벽의 위치 상 낮시간의 직사광이 생활의 주요 동선 상 너무 눈부신 벽면을 만들 경우가 있다. 과한 직사광의 유입은 커튼이나 블라인드로 들어오는 빛을 조절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빛이 닿아 눈부신 면의 색을 바꿔주는 것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 집안 인테리에 맞춰 브라운이나 그레이의 컬러로 바꾼다면 눈부심은 훨씬 줄어든다.
공부방과 같이 공간의 용도에 따라 낮시간 쾌청하고 푸른빛을 보다 강조해 활동성과 집중력을 높이고 싶다면 빛이 닿는 주요 면의 색상을 푸른색으로 바꾸는 시도를 해볼 수 있다. 반대로 따듯한 색의 온화한 빛환경을 만들고 싶다면 베이지와 같은 난색을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반사로 인한 빛의 변화를 최대한 줄이고, 광원에서 나오는 직접광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면, 벽의 색을 최대한 어둡게 만들면 된다. 형형색색의 조명을 사용되는 공연장이나 클럽, 극장의 벽면이 어두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집에 큰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즐기기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면, 벽면의 색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 스크린에 나오는 색에 따라 공간의 색이 과도하게 바뀌는 것 역시 영화의 몰입에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색뿐 아니라 표면의 광택도 역시 빛 반사에 영향을 준다. 같은 색상을 가진 벽면이라 하더라도, 광택도가 높은 벽면이 더 많은 빛은 반사시킨다. 예전에 사무실이나 병원 등에서 많이 사용했던 파라보릭 루버 형광 조명은 조명을 감싸고 있는 반사판을 거울과 같은 높은 광택도의 금속을 사용한 조명을 말했다. 높은 반사율을 가진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빛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올린 것이다. 하지만 높은 광택도는 빛의 형태까지 함께 반사시킨다는 것 역시 고려해야 한다.
무광의 벽면은 반사율이 떨어지지만 편안하게 퍼지는 형태로 빛을 반사시키며, 광택도가 높은 벽면은 효율이 높지만 광원의 형태까지 함께 반사시켜 눈부심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바닥의 경우 천장에 설치된 인공조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면이기 때문에, 대리석과 같이 광택도가 높은 마감재의 경우 천장 조명을 그대로 반사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꼭 고려해야 한다.
물론 인테리어 요소에서 벽과 천장의 색, 그리고 광택은 조명의 입장으로만 생각해 고르는 것은 아니다. 바닥의 경우 재료의 특성과 강도, 청소와 같은 유지관리까지 고려해야 할 요소가 더욱 많아진다.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보이는 심미적인 요소가 선택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냥 개별적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이 사실상 반사체로써 조명의 역할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모든 사물은 각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빛 안에서 서로 상호작용 하고 있다. 마치 따로 또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처럼.
모든 사물은 각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빛 안에서 서로 상호작용 한다.
마치 따로 또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처럼.
빛이라는 요소로 공간을 바라볼 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조명기구 역시 어떠한 빛을 어떻게 반사시키느냐를 고민한 결과로 바라볼 때 바깥으로 보이는 조형성을 넘어 새로운 세상이 보이게 된다. 세계적으로 명품이라 불리는 조명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치열한 고민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제 새로운 눈으로 공간과 조명기구를 바라보자.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보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