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아름다운 색 조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빛 이야기
우리의 귀는 특정 주파수의 음을 더 크게 듣는다?
인간의 청각은 청각은 선천적으로 ‘파’라고 불리는, 350Hz의 주파수를 가진 4번째 F음을 동일한 진동의 다른 음에 비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로 인해 다른 음에 비해 더 크게 듣게 되며, 같은 세기로 다른 음과 함께 연주할 때 F음이 유독 귀에 거슬리게 들렸던 이유는 이 현상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악기와 스피커는 이러한 현상을 고려해 4F의 소리가 다른 소리에 비해 적게 들리도록 튜닝되거나 제작되며, 이 현상에 민감한 뮤지션들은 아예 이 음의 사용을 배제하고 작곡을 하기도 한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음악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분이라면(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위의 글을 읽으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인상을 찌푸렸을지 모른다. 맞다. 우리의 청각이 특별히 더 크게 듣는 음이 있다는 사실은 알려진 바 없다. 당연히 악기나 스피커도 이를 위한 특수한 튜닝을 하지 않는다. 특수한 영역의 파장에 우리의 감각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청각이 아닌 시각의 영역에서 말이다.
내가 한창 조명설계를 하던 2000년대 후반은 기존 광원들에서 서서히 LED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신기술 지원정책에 힘입어 지자체는 아직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LED를 사용했다. 돈을 썼으면 티를 내고 싶은 법. 비싼 LED 조명을 보여주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컬러를 사용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총천연색 빛을 자랑하는 교량과 육교들이 많이 생겨났다. 당시 반강제로 컬러 연출 계획을 진행하며 이색 저색을 넣어 작업을 하고 있던 나에게 뒤에서 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초록색 빛은 절대 쓰지 마!
처음에는 개인의 취향을 너무 디자인에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절대’라는 말은 함부로 붙이는 것이 아닐진대, 세상에 다양한 색이 있고 조합이 있는데 초록색은 쓰지 말라는 소장님의 명령에 살짝 반발심도 났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 눈이 가진 어떠한 특성 때문이었다.
우리는 홍채를 통해 굴절된 빛이 망막에 맺힘으로 시각정보를 인지한다. 망막에는 원추세포와 간상 세포라는 두 가지 시세포가 존재하는데, 원추세포는 밝은 환경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하며 간상세포는 어두운 환경에 활발하게 활동한다. 우리의 시신경은 이 두 가지 세포가 상황에 따라 조화롭게 역할을 분배하며 이루어진다. 그래서 수만 룩스의 정오의 태양 아래서도, 1룩스가 채 되지 않는 달빛 아래서도 사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한 특이한 현상도 발생한다. 바로 세포 별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빛의 파장 영역대가 다르다는 것이다.
푸르키녜 효과(Purkinje effect)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이를 발견한 체코의 생리학자 얀에바게리스타 푸르키녜에서 그 이름을 따 왔다. 이 현상에 따르면 우리는 낮시간에는 555nm파장의 노란색-빨간색 계열의 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어두운 밤에는 507nm 파장, 즉 녹색-파란색 빛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바꿔 말하면, 동일한 에너지의 빛이라 할지라도 밝은 곳에서는 노란 계열의 빛을, 어두운 곳에서는 녹색 계열의 빛을 더 밝고 강하게 인지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컬러의 조합이라도, 주변 밝기에 따라 색의 조합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밤을 밝히는 야간경관 조명에서 녹색을 피해야 할, 또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리적으로 동일한 광량의 빛을 사용하더라도 녹색빛은 어둠 속에 우리 눈에 더욱 강하게 인지된다. 특히 절대적인 태양빛으로 인해 반사/산란하는 주간의 빛환경보다, 광원이 직접 빛을 내는 야간의 빛환경에서 이 현상은 더욱 도드라진다. 여러 가지 색이 어우러졌을 때 녹색 계열의 색이 다른 색에 비해 쉽게 튀거나 촌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우리 눈이 가진 이런 특성 때문이다. 이처럼 녹색은 빛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민감함 색이다. 이는 단지 야간조명뿐 아니라 폭넓은 디자인의 영역에서도 알게 모르게 사용되고 있다.
늘 감탄을 마지않는 애플의 홈페이지에선 녹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얼핏 보아선 다양한 색의 그라데이션이 화려하게 화면을 수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메인화면이나 면적이 넓은 배경화면에서 녹색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녹색이 사용되는 경우는 눈에 잘 띄어야 하는 주요 아이콘이나 토글스위치, 상태 표시 바와 같은 작은 크기의 기능적인 영역에 한정된다. 만약 음계 중 우리의 귀가 특정음을 튀게 감지한다면, 뮤지션은 그 음은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거나, 또는 아예 배제하고 음악을 만드는 방식을 찾으려 할 것이다. 애플이 이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컬러를 사용하지만 유치하거나 촌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녹색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 것이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초기 애플의 로고에는 다양한 컬러와 함께 녹색이 들어갔지만 현재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에 반해 구글은 여전히 로고에 다양한 색과 함께 녹색을 과감히 사용한다. 각각의 밝기와 크기가 다르게 보일만큼 컬러 조합이 강하다. 고급스러움이나 시각적 편안함은 떨어지지만, 구글 로고의 녹색은 그만큼 눈에 잘 띄고 선명하다. 이런 민감한 때문에 녹색은 로고에서 대부분 독립적인 색으로 쓰이거나, 검은색, 흰색과 같은 무채색과 함께 더 많이 쓰인다. 앞의 이유와 반대로 필요에 의해 일부러 녹색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사례는 아주 가까이에 있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 보는 교통안내 표지판이다.
왜 교통표지판은 녹색으로 만들었을까? 이를 궁금했던 적이 있다면 푸르키녜 효과가 그 답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엔 눈의 피로도를 이유로 알려진 경우가 많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표지판을 보다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해 보인다. 정지신호를 포함한 빨간색이 빠르게 위험 신호를 보내는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표지판은 눈에 잘 띄어야 하며, 배경과 글자색의 차이로 인한 명시성이 중요하다. 특히 어두운 환경에서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색이 녹색이라는 점은 우리나라를 포함 많은 나라에서 녹색 교통표지판을 채택한 이유다.
이처럼 우리의 눈이 특정 영역의 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조명과 디스플레이 장치들은 우리 눈의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여 세팅된다. CIE(국제조명위원회)는 1924년 표준 비시감도 곡선을 발표해 이러한 변화의 기준을 제시하고, 다양한 기업과 기관들은 이를 기준으로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준일 뿐, 사람마다 민감한 정도의 차이는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어렵다. 조명기구마다, 디스플레이마다, 주변 환경마다,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감도 변화를 보인다. 그래서 색의 미세한 차이를 다루는 분야일수록, 녹색의 빛은 매우 다루기 어려운 존재다.
조명기구마다, 디스플레이마다, 주변 환경마다,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감도 변화를 보인다. 그래서 색의 미세한 차이를 다루는 분야일수록, 녹색의 빛은 매우 다루기 어려운 존재다.
녹색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의 색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또 그만큼 많이 사용되는 색이다. 녹색을 보다 아름답게 사용하고 싶다면, 최대한 조심해서 다루기를 권한다. 어둡거나 밝은 곳, 출력물과 다양한 스크린에서 검토하여 조화로운 빛을 만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