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분노 중, 과연 세상은 움직일 것인가?
현실을 도피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힐링’ 코드가 가고 ‘분노’를 바탕으로 한 콘텐츠가 도래했다. 과거와 달리 얼버무리거나 현실을 감추려는 식의 콘텐츠보다는 대중이 느끼는 ‘분노’를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사실 대중의 비판적 수용의 가능성이 커지고, 대중문화가 가진 진보적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대중은 대중문화로 인해 ‘사이비 행복’에 젖지 않게 되는 것일까? 대중은 대중문화를 통해 왜곡되고 부조리한 현실을 파악함으로써 그들의 갈망이 주체적으로 현실로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일까?
분노 콘텐츠가 사회를 꼬집고 현실을 파악하게 하기는 하지만 그의 본래 소속은 역시 대중문화이다. 대중문화의 특성은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것이고 이것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지점과 맞물린다. 문제제기에만 그칠 경우 대중이 흥미를 잃고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분노 콘텐츠 역시 현실을 환기시키면서도 결국 결말에는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판타지적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분노 콘텐츠 또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암살>과 <베테랑>이 내놓은 결말을 주목해보자.(스포일러 있음) <암살>과 <베테랑>은 러닝타임 내내 답답한 사회의 현실을 폭로하지만 이어지는 결말은 지독히 판타지적이다. <암살>의 후반 부, 염석진(이정재)은 해방 후에도 경찰 고위직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고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역시 증거인멸과 뻔뻔한 거짓 증언으로 석방된다. 그러나 길거리를 걷던 중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과 임시정부 대원 출신 명우가 쏜 총에 맞고 후미진 골목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염석진이 총을 맞은 후 시내 길거리에서 벌판으로 장면이 전환되며 지극히 판타지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베테랑>의 경우도 서도철(황정민) 형사는 정치와 법 위에 군림하는 재벌의 악행을 끝까지 쫓고, 기어코 조태오를 시민이 모두 쳐다보는 시내 한복판에서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난 뒤 검거한다. 고도로 전략적인 재벌이 이성을 잃고 모두가 보는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검거되는 장면은 매우 영화스럽고 판타지스럽다. <암살>과 <베테랑>의 결말은 전형적인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며 상황도 공간 연출도 매우 판타지적이다.
이러한 판타지적 결말은 과연 현실과 이어졌을까? 물론 <암살>과 <베테랑> 이후 수많은 사회적, 현실의 재조명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암살>의 경우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잔재와 뻔뻔함이 사람들의 분노를 끌어 모았고 극 중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암살>의 전지현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1천 9백 명이 넘는다’(오마이뉴스)와 같은 기사가 연일 쏟아지고 다큐멘터리 [여성 독립운동사] (EBS)가 TV로 방영되는 등 여성 독립운동가가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또한 광복 70주년과 맞물리면서 독립운동 자손과 친일파 자손의 현실을 비교하는 논의와 기사 역시 쏟아졌다. <베테랑> 역시 ‘영화 <베테랑>에 영감을 주었던 실제 사건 3가지’(허핑턴포스트 코리아)가 보도되었고, ‘재벌 그룹 대마초 파문’, ‘SK 최철원 씨 맷값 폭행 사건’, ‘한화 김승연 회장 아들 대신 보복 폭행’ 등 과거의 사례가 다시금 언급되면 이를 개탄하는 목소리가 타임라인을 달구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는 여전히 현실 변화나 개혁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친일파 후손과 독립 운동가의 후손에 대한 사회적 시선집중은 많아졌지만 여전히 현실은 그대로이다. 친일파 후손은 여전히 사회적 고위층을 차지하며 잘 살고 있다. 재벌의 행태에 대한 재조명도 진행되었지만, 재수사가 이루어지거나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현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의 분노를 통해 답답한 마음을 잠시나마 덜어내고, 판타지적 해결을 통해 안도감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재벌의 형태는 두 가지로 나뉘고 있다. 우리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 같은 소위 백마 탄 왕자 재벌에는 환호하고 열광하지만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이나 드라마 <리멤버>의 남규만(남궁민)의 부도덕한 행위에는 분노한다. 같은 재벌이지만 김주원은 백마 탄 왕자이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고, 조태오와 남규만은 ‘나쁜 재벌’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재벌은 ‘나쁜 행동을 한 재벌’이어서 나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소위 ‘갑질’을 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우리의 분노를 더욱 일으키는 것뿐, 사실 나쁜 것은 재벌 그 자체이다. 사회적 부가 한쪽으로만 초집중해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가 나쁜 것이다. 흙수저가 흙수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사회적 부의 대물림 현상이 나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태오의 행동과 남규만의 행동에 집중하고 분노한다. 분노 콘텐츠를 통해 지나치게 분노의 과녁이 왜곡되고 초점에 혼돈이 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재벌 그 자체가 형성된 사회 시스템이지만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부도덕한 나쁜 재벌’ 클리셰에만 집중 해 그 근본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근본적 분노가 단순한 표피적인 현상에만 머무르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국 영화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는 수직 계열화와 수평 계열화를 주도하는 한국형 문화권력 재벌이 문화 산업을 독과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도한 CJ 엔터테인먼트와 쇼박스라는 한국형 대기업이 불합리한 사회 문제를 소재로 가져와 분노 콘텐츠를 제작한다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중문화 비판론을 원용하여 설명할 수 있다. 구조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피적 현상의 밑바닥에 존재하면서 그 표피적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이다. 그들에 의하면 어떤 문화적 텍스트나 행위는 그 자체로 본질적 의미가 가진 것이 아니다. 문화적 표상 속에 숨어 있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탈춤이 텍스트나 표면적 내용만 보면 지배 체제와 사회 전체를 비판하는 듯 보이지만 구조적으로는 체제 유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과거 카니발이 파괴와 저항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카니발을 통해 민중은 카타르시스를 표출하면서 체제 유지를 지속해 나간다는 것이 구조주의를 설명하는 사례이다.
표피적으로 대중은 ‘분노’ 코드를 발산하고, 영화적 텍스트로 사회를 비판하는데 동참한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현실 개혁과 연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영화를 소비함으로써 CJ와 쇼박스라는 한국 문화 산업의 수직 계열화와 수평 계열화를 주도하는 한국형 문화권력 재벌과 지배계층의 배를 채워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으로는 불합리한 사회를 드러내고 비판하며 심지어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허용하지만, 문화적 표상 속에 숨어 있는 구조는 상업적 흥행과 자본의 유지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논리로 인해 재벌을 비판하는 내용의 영화 <돈의 맛>이 롯데에서 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대중이 주체적으로 대중문화의 구조주의적 요소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분노’와 ‘갈망’이 현실로 이어지지 못하고 깜깜한 스크린 속에서 판타지적 결말에 대리 만족하고 분노하는 수준에서만 끝날 수도 있다. 심지어는 대기업과 재벌의 자본주의적 체제 유지에 도움을 주는 결과로 끝맺음할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분노와 갈망이 현실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구조주의 이론뿐 아니라 자본주의 속에서 발현되고 있는 대중문화 산업 구조주의의 논의를 잘 파악해야 한다. 제대로 된 구조 파악 없이 영화 속 스크린만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세상으로 나와서는 그 분노가 바로 사그라진다면 공허한 ‘힐링’ 담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분노’를 진정한 현실 변화와 변혁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대중이 대중문화를 단순한 대중문화로만 보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분노의 카타르시스 충족에만 머무를 것인가, 이를 현실 인식과 실천으로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와 선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텍스트와 표피적인 현상만 파악한다면 영화의 텍스트인 사회 비판과 분노 코드는 정의 실현에 대한 대리만족을 주는 일시적인 해소의 도구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by 박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