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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24. 2015

이십대_온실 밖 꽃봉오리를 위하여

스물에 대하여

“사람들이 우리 보고 좋은 때다 좋을 때다 그러는데, 애매하게 뭐가 없어.”


이 대사는 올 3월 개봉한 영화 ‘스물’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 ‘스물’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아름답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시기 ‘스물’을 보내는 세 친구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렸다. ‘스물’이라는 영화는 기존 청춘 영화가 뻔하고 지루하다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으며 300만 관객을 돌파하였다. 이 영화가 이토록 많은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의 작품들처럼 ‘젊음’을 그저 아름답고 찬란한 

것만으로도, 그저 안타깝고 도와줘야 할 대상만으로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인 ‘젊음’이지만 그것을 망각한 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우리들의 진짜 젊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림 출처 : <@ssoralee 인스타그램>


여기서 우리는 스물이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물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는 변화하고 있다. 기성세

대의 스물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기회이며 책임감을 의미했다. 자연스러운 독립과 더불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의미했었다. 20살이 된다는 것은 곧 어른이 된 것이므로 그로 인한 사회적 책임감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나 2015년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이십대는 어른이라는 의미보다는 학생의 의미에 가깝다.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80%를 육박한다. OECD 국가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하게 지켜내고 있다. 즉 우리에게 스물은 어른이라기보다 단지 엄마의 용돈을 받는 ‘학생’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필두로 몇 년 사이 고민이 많은 청춘들에게 용기를 북돋는 것은 흡사 유행처럼 사회에 퍼졌다. 청춘들을 위한 ‘멘토’들의 지침서도 서점에 쌓여가고 있다. 우리는 아프다. 왜 우리의 청춘은 아픈 삶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을까? 아픈 우리들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정확한 진단 하에 말이다.

10년 지기 친구가 어느 날 그런다. “난 그냥 쉴 땐 쉬고, 일할 땐 일하는 평범한 행복을 원했는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렵지?” 친구는 초중고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일탈 한번 해 본적 없이 곱게 자라 의대를 진학한 재원이었다. 지금껏 잘 견디다 이제야 비로소 미래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단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최대한 냉철한 얼굴로 환자와 환자가족들을 마주해야 하고 환자들의 아우성을 일일이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의사, 급한 환자가 생기면  한두 시간 자지도 못하고 잠옷 바람으로 나와 환자를 봐야 하는 의사가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자신은 나름 진지한 고민을 하는데 정작 주변 사람들은 ‘너 의사니까 이제 돈 잘 벌겠네’ 하는 통에 쉽게 고민이라고 말도 못하겠다고. 

온실 속 화초는 비바람을 맞지 않는다. 그래서 연약한 줄기가 꺾여본 일이 없고, 그렇다고 딱히 꿋꿋하게 버텨낼 일도 없다. 야생초와는 달리, 더 크고 예쁜 꽃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갖은 정성으로 키워진다. ‘법칙대로’ ‘필요 없는’ 꽃, 잎, 가지들이 알아서 솎아지고, 때에 맞춰 처방되는 비료와 약만 있다면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다. 그러나 한번 길들여진 꽃은 한두 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금방 풀이 죽는다. 사람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태어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사실 잠깐의 비바람도 견디질 못하는 게다. 10년 지기 친구는 잠시 바깥에 나온 온실 속 화초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사실 온실 속 화초들에게 거는 욕심은 ‘넌 더 예쁘게 자랄 수 있어’라는 반복적인 최면에서 비롯된 자의식의 과잉을 부른다.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람들 스스로를 명분이 없어도 성공을 위한 삶을 갈구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은 사회의 잣대에 맞춰 스스로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욕심을 부려야만 했다는 얘기다. 게으름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다 이제는 인간 스스로를 괴롭혀서 만들어내는 우울증, 성격장애 등의 신경증적인 질병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실체가 없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과잉된 자의식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결핍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 묻게 된다.

주거·교육·보건 등을 반영한 OECD의 종합 행복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OECD 34개국 중 27위로, 최하위권이다. 객관적으로는 과거보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아지고 개인의 성취가 강조되며, 사회적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질 못한다는 얘기다. 내가 나를 뛰어넘어야 하고, 오늘과 다른 내일이 또 올 것이라고 믿어야 위안을 받는 사람들. 실제로 2030의 강박장애는 절반에 이른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경쟁에서 뒤쳐질 것 같은 두려움'이 20대와 30대에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풀이했다. 스스로에게 가혹한 욕심 혹은 가혹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이행해야만 진정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삶은 스스로에 대한 특정 가치를 높이는 길이기만 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만 행복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 행복은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온실 속 화초는 타인에 의한 수많은 과정들에 의하여 꽃봉오리를 피워 내기 때문이다.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만들어낸 결실이 아닌 강요된 누군가에 의하여 온실 속에서 길러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우리 청춘들은 아프다. 이 고통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는 이제 지금껏 마주한 적 없는 온도를 마주해야만 한다. 온실 속에서 나올 용기가 필요하다. 고학력화가 진행되면서 청년층의 취업 눈높이는  높아졌다. 대기업·공기업·공공기관 등의 일자리 증가 속도와 구직자 눈높이의 상승 속도 사이에서 괴리가 생겨난 것이다. 공무원과 공기업 공채 경쟁률이 수백 대 일에 달하지만 학원 앞은 문전성시다. 통계청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청년층 취업준비생의 34.9%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기성세대보다 더 체면을 생각하고, 안전지향적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정부와 기업의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분명한 책임을 지우며 그들은 우리에게 올바른 처방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하지만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 뒤에 숨어 진짜 자신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싶은 일’ ‘잘 할 수 있는 일’과는 무관하게 ‘오래할 수 있는 일’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사람들이 걷지 않은 길이기에 처음 하는 길이기에 무섭고 아프고 울어볼 수 있다. 이것도 우리의 특권이 아닐까? 그렇게 하나하나씩 배워나가 우리는  진실된 또 다른 결실을 맺을 것이다. 우리는 다 잘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지금과 같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우리에겐 잘못 접어든 길에서도 다시 돌아갈 시간이 충분하다.” 


영화 스물의 엔딩 장면의 대사이다. 우리의 스무 살 기억에서 볼 수 있듯, 가끔 한심하고 애매하게 뭔가 없더라도 그때를 있는 그대로 자신에 의해 형성된 자기를 사랑하게 도와주는 것이 진정 우리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스물’의 명대사가 그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는 것 같다.


                                                                                                                                  by 유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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