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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24. 2015

30대_내가 술(酒)을 마시는 이유

술(術)이 술(酒)을 부르는 시대

“아 미안해. 어제 일은 정말 실수야. 술 먹고 내가 실수를 했어. 미안해”


한 드라마의 대사이다. 흔히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은 술을 먹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상대에게 무지막지 뱉어낸다. 남자 주인공은 그걸 가만히 듣고 있다. 다음날 그녀는 사과를 한다. 실수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녀가 말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드라마 <금나와라뚝딱> 중


어느 날 충무로에서 술을 마시다 왁자지껄한 술집을 보며 문득 떠올랐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엄청난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의 음(陰)양(陽)이나 이야기의 질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단지 술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든 더 많은 이야기를 토해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뱉어낸 토사물들은 정처 없이 술집을 가득 메운다. 우리는 무슨 말이 그토록 하고 싶은 것일까? 


흔히들 ‘술이 술을 부른다.’고 한다. 한국 술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고야 만다. 끝을 보는 우리네 지독한 술 문화이다. 2015년 12월 연말, 다양한 술자리를 바라보며 나에게 술, 그 의미가 한층 더 씁쓸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술을 들이켜야 하는 내막을 알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술(術)이 술(酒)을 부르는 시대다.


술(術)은 고대부터 생존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포도주를 제조해 즐겨 마셨으며,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며 축제를 여는 등 술(酒)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술(術)의 역사도 이에 못지않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언변술’의 선구자로서 민주정의 교육자로 인기를 누렸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뒤이어 아리스토텔레스도 추방당하는 운명을 맞았을 때도 소피스트들은 여전히 그리스 시민의 ‘지혜로운 자’로 남았다. 그들의 언변술과 상대주의적 태도로 마찰을 최소화했기 때문이었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가후도 여러 주군을 섬기면서도 높은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되레 조비를 황제로 옹립하는 데 일조하는 등 혼란의 정세 속에서도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격동의 중국 정세를 바로세운 덩샤오핑도 있다. 그들은 오늘날에 ‘처세술의 달인’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는 서민들도 술(術)을 갖춰야 하는 상황이 됐다. 우리 현대인의 사정은 더욱 가혹하다. 술을 잘못 쓴다면 독배와 추방을 면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어쩌면 더욱 절박할지도 모른다. 


회사의 위치는 여의도가 아닌 강남역. 그러나 나는 한 정당에 들어간다. 이것은 새누리당도 아닌 새정치민주연합도 아닌 ‘김부장’정당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한 정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선술’을 쓴다. 승진을 앞둔 부장님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회의 중 부장님과 눈을 마주치는 횟수를 늘린다. 그들의 머리에 각인돼 관계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부와 눈치를 바탕으로 ‘대인술’을 펼친다. 생존과 직결되는 직장 내 파벌이나 승진 문제 등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회식자리에서 그의 옆자리는 모두 나의 몫. 그에게 소맥 한잔을 타서 올린다. 소맥과 더불어 ‘감(甘)술’을 펼친다. 달콤한 술들이 목구멍으로 쏟아진다. 이 술은 목으로 넘길 때 보다 귀로 넘길 때 훨씬 달콤하다.  온갖 달콤한 말들로 부장님의 한껏 상기된 기분을 만든다. 회식자리가 마무리 되고 부장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릴 택시를 잡는다. “우리 부장님 집까지 안전 귀가 부탁드리겠습니다. 기사님! 수고하십시오!” 평소 상대에게 감사의 마음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우리는 그를 모실 기사님에게 감술을 이어간다. 이 모든 술들은 지독한 사회에서 독배를 들이키지 않기 위한 발악이다. 이번 달 카드 값 연체를 막아 내야하기 때문. 


위치를 옮겨 온다. 우리는 살림에 조금이나 보탬이 되기 위해 며칠에 걸친 꼼꼼한 가격 비교를 한다. 이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싼 값에 물품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러 매장를 돌아다닌다. 정보의 바다 속에서 끊임없이 체크하며 후기를 검색하고 수소문 한다. 물품에 대한 정보를 지인들에게 수소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점원 언니와의 기 싸움에서 승리하여 만원을 깎아 물품을 구매한다. 바로 ‘눈치술’이다. 눈치는 보이지만 뿌듯한 쇼핑이다. 뿐만 아니라 서점에서도 각종 술(術)에 관한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 세상의 모진 풍파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 책을 산다. 우리는 지옥철을 오가며 그 많은 술수에 대한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습득한 새로운 형태의 술수를 또 다시 쏟아낸다. 


늦은 시간, 포장마차와 술집은 사람들로 붐빈다. 각종 술(術)로 지친 심신을 술(酒)로 풀어낸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누군가를 성토한다. 직장 상사, 깐깐한 점원, 혹은 생존에 걸림돌이 되는 그 누군가다. 웃는 낯으로 술(術)을 발휘하여 생존해왔지만, 허위와 가식으로 연명해야 하는 우리의 세태는 피곤하다. 우리의 팍팍한 인생은 서글프기 그지없다. 술의 주 성분인 알코올은 그런 의미에서 해독제다. 우리의 지친 마음을 그 순간 잊게 하기 때문이다.


술이 술을 부른다는 말은, 낮 동안 술(術)을 발휘해 상대방의 기분에 맞춰야 했던 오욕을 술(酒)로 다시금 씻어낸다는 현대적 의미를 갖는다. 정신의 해독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씁쓸한 술(術)생존법, 술의 의미를 다시 돌이켜 봐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우리의 팍팍한 삶을 연명하기 위하여 술을 마신다. 그 순간,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달픔을 성토하며 한잔을 기울인다. 나의 걱정과 근심은 상대에게 전이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숙취와 함께 일상의 술이 시작된다.


“아 미안해. 어제 일은 정말 실수야. 술 먹고 괜히 말한 것 같다. 내가 실수를 했어. 미안해”


                                                                                                   by 유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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