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궁전에서는 정기적으로 모임이 열렸다. 한 두 달에 한 번씩 회원들이 모여 미술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다과도 나누는 전시회적 성격이었다.
최 진구 화백 역시 회원 중 한 사람이었다. 대기업에서 수차례 거창한 개인 전시회를 열어줬을 만큼 미술계에서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력만 놓고 따지면 할머니의 남자로서 충분히 훌륭했다.
하지만 늘 덥수룩한 머리에 대충 차려입은 옷차림. 고분고분한 성품도 아니며 세련된 말씨도 아닌. 유명 인사치고는 자기관리를 도통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남의 시선 또한 의식하지 않아, 기분 좋으면 술에 취해 아무데서나 드러누워 잠들기 일쑤였다. 반대로 기분이 뒤틀리는 날엔 폭언으로 주위를 싸하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평소 최 화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현재 미술을 전공하고 있어요. 주로 인물이나,
요새는 개나 소나 예술하는 세상이라지. 에라이.
내가 처음 자기소개 했을 때도 그는 이런 식이었다. 나도 욱하는 성미에 들이받을 뻔 했지만, 초면에 몰상식해지고 싶지 않아 간신히 꾹 참았다.
그림의 ㄱ자도 모르는 여편네가 산속에 틀어박혀 애쓴다 애써.
할머니에게도 종종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었다.
그러면 회원들이 다들 한소리씩 했지만 정작 할머니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저 한번 쿡 웃고 말 뿐이었다.
한동안 그가 정기모임에 나타나지 않아 제명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보름 전 비렁뱅이 몰골을 하고는 할머니를 따로 찾아 왔었다고. 그날 할머니는 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주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최 화백이 할머니와 종종 밥먹고 밤까지 지새운 일이.
내가 보기에도 할머니는 꽤 미인이었다.
예순을 넘긴 나이치고도 훨씬 배젊어보었다. 165센티미터를 넘나드는 늘씬한 키에 군살이 없는 체형. 누구도 할머니가 일흔이 다 되어간다고 생각지는 못했다. 그런 할머니가 사별하고 혼자 산 지도 벌써 삼십 여 년. 슬하에 자식도 없었거니와 일가 친척도 없던 할머니는 외로웠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괴팍하고 별스러운 최 화백과 연인이라니!
벌써 육십번째 열리는 할머니의 궁전 전시회였다.
나는 이제 겨우 열 번째 참관이지만, 할머니를 도와 준비하는 데에는 익숙하다. 그래서 오전에 있을 전공 수업도 가볍게 제치고 궁궐로 향했다. 할머니를 위한 갓 구운 깜빠뉴와 애플시나몬스콘도 잊지 않았다. 꽃집에 들러 화병에 어울릴 만한 꽃도 샀다. 언제부턴가 이런 일들이 모두 내 차지였으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임의 한 축이 됐음에 기뻤다.
봄꽃의 향긋함에 취해 손끝이 떨렸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할머니의 남자'를 새삼 보게 될 것이니.
후. 찬찬히 살펴보면 그래도 괜찮은 점이 조금은 있겠지. 아무리 뜯어 봐도 화백으로서의 실력말고는 잘난 구석이 하나도 없던데. 할머니는 그의 재능에 매료된 것일까. 남녀사이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더니.
오늘 최 화백을 본다면 할머니에게 선물로 준 그림에 대해 넌지시 아는 척을 해봐야겠다. 내가 그 그림을 함께 감상했다는 것을 알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약한 성미의 사람은 어떤 식으로 수줍음을 탈까. 하도 뻔뻔한 이라 과연 수줍어하기나 할까. 그러고보면 내게도 괴짜 기질이 조금은 있나 보다.
위잉 위잉.
언덕을 오르는데, 가방 속에서 진동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꺼내보니 발신인은 준영.
어디야? 학교 안 왔어?
어. 일이 좀 있어서.
일? 무슨 일?
잠시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준영과 사귀는 사이기는 하지만 시시콜콜 궁전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충 산속에 사는 할머니와 친분이 있다는 정도로만 말해두었을 뿐이었다.
너 또 거기 산속에 갔어? 전공 수업도 빼먹고?
눈치 없는 준영이 웬일로 눈치가 빨랐다.
완전히 미쳤구나. 교양도 아니고 전공 수업인데. 얼른 학교로 다시 와.
끊을게.
아니, 나 거기 가는 거 싫다고 했잖아. 다음에 나랑 나같이 가든지. 어?
나는 손가락으로 종료키 버튼 위에 갖다 대었다.
야, 잠깐! 끊지 마. 할 말 있어. 나 뭔가 느낌이 안 좋아.
오늘 꼭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단 말야!
뚝.
나는 준영의 말을 무시한 채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휴대폰 전원을 끄고 가방 안에 던지듯 넣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