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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애 Oct 27. 2024

소설_10. 할머니와 최 화백

놀이가 시작되었다.

할머니와의 재밌는 궁전 놀이. 우리는 번갈아 가며 품평할 <오늘의 작품>을 정했는데, 오늘은 할머니 차례였다.


창작을 하는 사람은 원래 품평회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 작품이 도마 위에 썰릴 때의 씁쓸함과 긴장감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남의 작품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하자면 그건 또 재미진다. 단, 무분별한 비평이 아닌 전문용어 섞어가며 하는 그럴듯해 보이는 먹물 토론. 그건 짜릿하다. 할머니와 나는 그 코드가 정확히 맞아들었다.


실은 나 선물 받은 그림이 있어.

할머니는 작은방 문앞에 세워져 있던 그림을 들고 왔다. 잔뜩 달뜬 얼굴로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내게 쓱 내밀었다.


이번 그림은 아주 재밌을 거야. 역시 탁월한 선물답지.


할머니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람없게도 나는 코웃음이 나올 했다. 그림 속에는 화가 남자의 표정과 잔뜩 주눅이 여자의 표정이 상반된 분위기를 뿜고 있었다. 단순한 구도에 흔하디 흔한 그림. 단지 장점이라고는 남녀의 표정이 살아있는 정도였다. 게다가 그림 여자가 남자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기에 안쓰럽기까지 했다. 나는 저절로 미간이 찡그러졌지만, 할머니는 그런 아랑곳하지 않은 그림에 흠뻑 취해 보였다. 이번에도 감상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걸까.


남자가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


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남자는 화가 아주 많이 나 보이는데요?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네. 아마도 여자 때문에 화가 난 것 같아요. 여자가 남자 눈치를 보고 있잖아요.
아닐 껄.

순간 할머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였다. 나는 의아했다. 아무리 씻고 다시 봐도 남자는 분명 화를 내고 있다. 아니라고 단언하기에는 그림의 표현이 너무도 확실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어조 또한 단호했다. 확신에 찬 할머니의 음성은 늘 엄격했다. 그건 내가 놀이에서 질 확률이 99%에 육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
좋아요.
남자는 여자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거야.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쁨을 감추고 있지.
에이. 그러기엔 증거가 없잖아요. 그건 할머니 생각이죠.


잘 봐. 눈이 웃고 있잖아. 여기.

할머니는 남자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나는 그림 속 남자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남자의 눈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참으로 오묘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나는 뜻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


아닌 거 같은데요. 이건 누가 봐도 화내고 있는 얼굴이에요.


나는 자세를 고쳐 등을 곧추 세우고는 할머니의 반격을 기다렸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림을 내려다봤다. 대체 누가 준 그림이기에.


조금은 알려진 작품이라니 금방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거야.


알려진 작품이요? 이게요? 전 처음 보는데요?

그래 뭐. 선물이라니까 시답잖은 그림을 줬을 리는 없겠지.

그런데 누가 할머니에게 이 그림을 선물했을까.


할머니는 어느새 책을 찾으러 지하실에 내려갔다. 우리는 지금처럼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우. 함께 책을 찾아 본다. 궁전 안에 미술품 다음으로 많은 것이 작품설명에 관한 책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의 뒷모습은 작품에 대한 학구심보다 선물 받은 어린 아이의 과시욕이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할머니는 아마도 이 선물을 받고 꽤나 설렜던 것 같다.


먼지가 뽀얀 책 한권이 내 앞에 툭 떨어졌다. 할머니가 마른 천으로 표지를 닦아내자, <작자미상 미술품에 관한 작품설명>이라는 표제가 눈에 들어왔다. 책을 열고 목차를 손가락으로 훑던 할머니는 어느 페이지를 펼쳐 그림과 똑같은 사진을 찾아내었다.


있다, 있어!

할머니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바람 나서 집을 나갔던 누이가 돌아오자 반가운 마음을 애써 숨기고 일부러 화내는 남자의 심경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책에는 의외의 설명이 적혀 있었다. 이럴 수가.


나 천재인 가봐. 내가 이겼네?


할머니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내게 책을 내밀었다. 나는 글귀를 찬찬히 보다가 작품설명 밑에 깨알같이 달린 부연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화백이 덧붙인 의미는 그러하나 해석은 자유롭게 해도 좋다. 화백은 당시 사랑하던 여인과 오해가 풀려 화해의 의미로 이 그림을 선물했다고 했다. 그러나 여느 미술품이 그러하듯 작품을 보는 이에 따라 남자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도 틀린 감상은 아니라 하겠다.
 
-김의찬, <미술품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하여>, (제일대 대학원 박사 논문, 1987), 4-5쪽 참조-


틀린 감상은 아니라잖아요.


할머니는 책을 덮었다.


어쩜 이리도 내가 정확히 감정을 읽어냈을까. 하긴 처음엔 우리도 이랬었지.

할머니는 아예 내 말은 듣고 있지 않았다. 다만 어떠한 생각에 빠져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요?

순간 나는 할머니의 '우리'라는 단어에 귀가 꽂혔다.


응. 우리.
예?


할머니는 숫저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최 화백. 그림을 선물하는 건 정성과 마음을 주는 거지. 참 섬세한 남자야.

잠깐만요. 최 화백이라면, 우리 궁궐 회원 중에 최 진구 화백이요? 언제부터요? 언제부터 그 분이 섬세한 남자가 되셨는데요?



맙소사.

하필이면 그 괴팍한 최진구 화백이라니!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나 요새 연애한다.
우리, 열렬히 온 힘을 다해서, 사랑해.
네에?

할머니의 고백에 나는 완전히 넉다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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