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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애 Oct 26. 2024

소설_07. 구겨진 논문.

그 일이 있은 후, 인철 선배는 한동안 학교 안에서 보이지 않았다. 몇 달 뒤 학생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먼저 줄행랑을 쳤다. 겨울에 <피카소> 동아리에서 전체엠티를 갔을 때 길 잃은 나를 열심히 찾지 않은 것도 아마 선배의 뜻이었으리라.


 H와 헤어진 그 해 겨울, 할머니를 알게 된 그 해 겨울, 일 학년이 끝나던 그 해 겨울 나는 동아리를 탈퇴했다. 그리고 선배는 작년 이맘 때 졸업했다고 전해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

나는 그 해 겨울 H와 이별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궁전을 알게 됐지.



교수님 실망하시겠는 걸.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사물함 앞에서 열심히 논문을 구겨 넣고 있을 때였다. 돌아 보니 인철 선배가 서 있었다. 감히 내게 말을 붙이다니. 이젠 뻔뻔해지기로 작전을 바꾼 건가.


오랜만이다. 너도 휴학했었다며?


나는 별 대꾸할 가치가 없어 사물함 안에 논문을 계속 신경질적으로 욱여넣었다.


그래, 사실 읽어봐야 별 거 없어.
화백의 업적 정도지.
차라리 다른 거 해. 이를 테면 공모전 같은 거.
내가 도와줄까? 그래도 우리 한 때 같은  <피카소>였잖아.


인철 선배는 아까와는 말을 바꾸어 교수가 준 논문이 별 볼 일 없다고 치부하고 있었다. 그 앞에선 그렇게 굽신거려놓고.


선배가 절 도와준다고요? 왜요?


어? 그게... 그야 너보다는 내 실력이 아무래도,


듣자 하니 기도 안 차네.


뭐?


인철 선배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안됐지만 더이상 나는 순진했던 스무 살이 아니었다. 선배의 종강파티 고백 공격으로 인해 나는 전공 수업 시간에까지 여자 선배들에게 은근한 따돌림을 당했었다. 한동안 조별과제나 개인발표 때 난감한 일을 꽤나 겪어야만 했다. 그래서 한번 쯤 인철 선배를 만나면 호되게 되갚아주리라 벼르고 있던 차였다. 그 기회가 이제야 제 발로 찾아 오다니.


너 말 다했어?


인철 선배는 잔뜩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동안 선배에게는 감히 대드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럴 수 밖에. 그러고 보면 그동안 그는 꽤 오랫동안 왕노릇을 해왔다.


이젠 저한테 말 잘 거시네요? 한창 피해다니시더니.


나는 씩 웃어보였다. 싸움에서 상대방을 이기는 방법은 살살 웃어가며 급소를 찌르는 것이라고 했다. 예상대로 그가 날뛰기 시작했다.


내,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널 피해 다녔어?야! 나 최인철이야! 정신 차려! 너 지금 이 태도 뭐야?


아, 맞다! 하늘같은 선배님이었지! 선배니임, 그렇게 살지 말아요. 당신 최악이야.


나는 그를 한번 노려본 뒤 돌아서서 복도를 걸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드러낼 순 없었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하지만 곧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야!


인철 선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쫓아왔다.


야! 서 봐!


쿵쾅쿵쾅.

그의 발소리가 사나웠다.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곧 그의 큰 손 안에 내 어깨가 잡혔다. 나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힘주어 내려다봤다.


그래. 내가 한 번 봐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근데 너 더 이뻐졌다? 준영이랑 사귄다며? 그때 체육과 그 자식은 확실히 정리한 거고?


최악. 최악 중에 최악.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가만히 선배를 쳐다보았다.


아니 우리 준영이 잘해주라고. 순진한 애잖냐.
뭐, 순진한 거 싫으면 나한테 오든가. 옛날부터 니가 좀 까져, 아니다. 방금 껀 실수.


선배는 여전했다.  때 H가 흠씬 두들겨 주도록 놔뒀어야 했는데. 멋쩍은 듯 말하고 있지만 벌써 두번째 고백공격이었다. 나는 결국 헛웃음이 터져버렸다. 내 웃음소리가 컸는지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아이씨, 농담이야 농담.

나는 일부러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귀가 빨개지더니 허겁지겁 도망을 쳤다. 이제야 상황파악이 된 눈치였다. 도망가는 선배의 등 뒤로 나의 웃음소리가 복도 끝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아무래도 인철 선배와는 앞으로도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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