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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애 Oct 26. 2024

소설_06. 일 학년 그 해...연애 그리고 인철선배

H.

그와의 달콤한 연애.

특히나 그와 보내는 주말의 짜릿함.


주말은 자그마치 30시간도 넘게 붙어 있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다. 그래서 토요일 아침이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사탕 다섯개를 입에 가득 문 것 같은 기분. 과하게 달짝지근하지만 뱉고 싶진 않은 내가 좋아하는 H맛 사탕. 잠깐 볼 수 있는 주중보단 주말을 기다리는 건 여느 연인이나 당연했다.


하지만 인철 선배는 동아리 일정을 은근슬쩍 주말까지 추가시켰다. 마치 내 입안의 사탕들을 모조리 손가락으로 빼내고야 말겠다는 사람처럼. 그는 마치 작정한 듯 보였다.


네가 남자친구가 있는 건 이해하겠어.
둘이 한창 불타오르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남자에 정신팔려서 동아리에 소홀한 건 회장으로서 못 참지.
안 그래?

남이사. 정신이 팔리든 말든. 꼭 그렇게 표현해야만 할까. 동아리 활동이 연애포기라는 공식은 없었다. 게다가 연애 중인 학우가 동아리 내에 나뿐인 것도 아닌데. 인철 선배와 일면식도 없던 H는 웃어 넘기자고 했지만, 나는 퍽 불쾌했다. 어쩐지 선배는 나를 졸업할 때까지 괴롭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괜찮아. 거기에 같은 과 사람이 많아서 너한텐 동아리 활동도 중요하잖아.

잘생겼는데 착하기까지 한 H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주말에까지 동아리에 시간을 뺏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인철 선배에 대한 경외심으로 <피카소>에 가입했으나. 그건 그가 데뷔한 화가라는 소문만 듣고 행동한 내 경솔함의 댓가였다. 게다가 하필 나는 학년 부기장이었다. 애석하게도 이미 떠맡아버린 직책. 동아리 가입 초반에 인철 선배는 나를 부기장으로 지목했다.


처음에는 데이트를 미뤄둔 동아리방으로 열심히 갔다. 선배는 분명 오전에만 회의를 거라며 소집했다. 그렇게 오전 시작된 회의는 점심 식사 이후까지 지속됐다. 가끔은 저녁 식사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나오는 인원도 대여섯 명에 그치는 수준. 그것도 주로 기숙사 생활을 하거나 주말이 심심한 부류였다. 그렇게 속아준 나는 인철 선배가 협박을 한대도 주말에는 절대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면 다음날 <피카소> 전체 소집을 했다.


부기장 씩이나 되는 녀석이 동아리도 내팽개치고 아주 남자에 미쳤어.


뭐 이런 식이었다.

덕분에 처음 그에게 가졌던 존경심 따위는 애초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나를 부기장으로 묶어 놓고 한 학기 내내 월요일마다 아주 찰지게 구박했다. 인철 선배와 친하게 지내던 여자 선배들도 대체 그가 나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종강 모임에서 마침내 연유가 밝혀졌다.





그러니까,
사람들 다 보는 종강파티에서
술 취해서 고백하고 껴안으려다 넘어졌다?
그 새끼 취한 거야? 취한 척 한 거야?
내가 보기엔 그냥 미친 거 같은데?


다른 선배들이 막아줘서 별 일은 없었어.
부회장이 질질질 끌고 가더라고.
사람들이 수군대길래 나도 그냥 가방 들고 나와 버렸지.


그 새끼, 선배고 뭐고 내가 손 좀 봐줘야겠네.
여태껏 다른맘 있어서 너 괴롭힌 거잖아.

H는 씩씩댔다. 진심으로 분노했다. 당장이라도 인철 선배를 만나러 학교로 쳐들어갈 모양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H의 말대로 선배는 그동안 내게 관심이 있어서 나를 그토록 괴롭힌 거였다. 그걸 한 학기 내내 몰랐다니. 빙충이같이.


취해서 기억도 못할 걸. 선배들이 대신 사과할 정도였으니까. 이젠 내 앞에서 얼굴 못 들겠지.
나 헤어지지 않는다고 단단히 말해뒀어.
미안해. 내가 혹시 오해 사게 한 행동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했어.


네가 여지를 줬다곤 생각 안 해. 난 널 믿으니까. 원래 그런 부류들이 있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럼 됐어.


나랑 사귀고있다고 확실히 말 한 거지?


다른 여자들이 니가 나랑 헤어졌나 잔뜩 기대한 눈치던데? 안 헤어졌다니까 다들 실망했어.


이렇게까지 말해주자 H는 채근을 멈췄다. 아까보다는 약간 진정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애꿎은 아이스커피만 들이마셨다. H는 진지했다. 마시던 컵 안의 얼음들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인철 선배를 손  줄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테이블 위로 그의 손을 살짝 포개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H는 그제야 평온해졌다.


나는 여학생들이랑은 눈도 안 마주쳐. 조별과제 같이 하게 돼도 눈을 막 피한다니까.


손등 위에 포개놓은 내 손을 쳐다보며 H는 묵묵한 농담을 건넸다. 굵은 저음으로 기름기 하나 없는 진지한 말투였으나 그건 분명 농담이었다. 진심 섞인 농담. 그건 나만이 알수 있는 그의 건조한 스타일이었다. 그렇게 질투하는 H의 모습이 귀여워 순간 쿡 웃음이 났다.


그럼 나도 이제 남자들이랑 눈 마주치지 말까?


아니. 내가 그 정도 마음이라는 거지.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H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서 내 옆으로 얼른 자리를 옮겼다. 바짝 붙어 앉은 그의 허벅지에 온기가 느껴졌다. 곧 내 옆구리를 감싸안으며 머릿칼을 귀 뒤로 부드럽게 넘겨줬다. 그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와 귀엣말을 속삭였다.



딴 데 가지 마. 계속 내 옆에 있어. 나도 그럴게.
그리고 그 자식은...아무래도 밤길 조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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