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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애 Oct 23. 2024

소설_05.치졸한 교수 그리고 인철 선배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는 다름 아닌 인철 선배였다. 나와 같은 동아리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추호도 달갑지 않은. 대체 언제부터 내게 이리도 적이 많았던 것일까. 선배도 나를 보고 놀랐는지 교수실 문 앞에서 잠시 주춤거렸다.


어서 와요. 인철군.
마침 논문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어요.


교수의 말에 인철 선배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여전히 기분 나쁜 그였다. 그러더니 곧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 아니라고.

나는 당신들과 무관한 존재라고.

그러니 앞으로도 영원히 나를 묶지 말라고!


감히 소리낼 수없는 마음 속 절규였다. 나는 이미 '지도교수'라는 특정 지위에 눌려 있었다. 내가 이토록 권력 따위에나 복종하는 세속적인 인간이었다니.


읽어볼 지 말지는 이 학생 자유라고 해 뒀어요.


네? 자유...요?


 인철 선배는 살짝 미간을 찌뿌렸다. 그리고 매우 의외라는 듯이 교수를 쳐다보았다. 교수는 뭐가 문제냐는 듯 한쪽 눈썹을 올려 가며 제스처를 해 보였다. 선배의 시선은 다시 나를 향했다.


정말이지 여긴 내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이 아니구나.


나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쯤이면 분위기상 자연스럽게 빠져주는 게 좋겠는데. 나보단 미술계에 남다른 애착을 지닌 두 위인이 열띤 이야기를 나누는 게 훨씬 유의미하지 않을까.

하지만 인철 선배는 쉬이 나를 놔주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나는 억지로 목례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우리가 인사를 나눌 정도로 다정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시하기엔 좀 과잉 반응 같았다. 선배와의 일들은 다 지난 일이니까. 더구나 나를 지금 지켜보고 있는 지도교수 앞에서.


아 둘이 아는 사이에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같이 학부 수업을 들었던가?


 교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반가워 했다.


네, 교수님. 과 후배기도 하지만 같은 동아리거든요. 제가 많~이 예뻐해줬죠.하하하.


오호라. 그렇군요. 이런 인연이 또 있네요.


그렇죠? 인연이라면 인연이죠. 하하.


아무튼 이래저래 잘 된 일이네요.


잘 된 일이라. 지도교수는 어울리지 않게 눈을 찡끗거리며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대체 뭐가 잘 된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우리 교수님이 주신 거면 영광으로 알고 무조건 협조해 드려야지. 니깟 게 자유는 무슨. 콱!


인철 선배는 손바닥으로 날을 세운 채 내 코앞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것은 친한 사이에나 나올 법한 행동이지만, 지금 그는 교수 앞에서 한껏 호기를 부려보는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예뻐해줬더라. 하.하.


하마터면 나는 코웃음을 칠 뻔했다. 아니, 박장대소를 하는 편이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교수님도 그래요. 한 번 주셨으면 얘기 끝난 거지.낙장불입 모르세요?


낙장불입? 그러네요.
맞네요 맞아. 낙장불입! 허허허.


 교수는 뭐가 재밌는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들어보는 교수의 호탕한 웃음 소리였다. 그러자 인철 선배도 따라 웃었고, 나는 생각지 못한 그들의 웃음 앞에 서서 손에 든 논문집 모서리만 만지작거렸다. 그저 뒤로 한 발자국 더 물러나며 작별 인사를 할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다행히 교수는 끝까지 강요하진 않았다.


아, 아닙니다. 정말 학생 맘대로 해도 좋아요. 강제는 나도 싫습니다.




나는 교수가 준 논문을 사물함에 쑤셔 넣고 있었다.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앞장만 들춰볼까 했지만, 인철 선배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최인철.

지독한 괴짜. 

아니 그냥 치사하고 치졸한 자식.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다. 키 185cm에 거구가 큰 체격. 여느 복학생들처럼 깔끔한 면바지에 티셔츠를 즐겨 입었지만 어쩐지 평범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목소리가 크고 시끄러운 면이 있어 사람들은 서글서글하다며 좋아했지만, 내가 보기엔 어쩐지 느낌이 영 별로였다. 조용한 성향인 나와 달라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땐 그냥 그랬다. 특히나 미간을 자주 찌푸리던 그의 버릇은 꽤나 예민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인철 선배는 일찌감치 데뷔한 화가였다. 때문에 선후배를 막론하고 아무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물 세 살에 이미 전시회 경험도 있었다. 이름을 내건 단독 전시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큰 대회에서 두어 번 높은 상을 입상한 경력이 있었기에, <신인 화가들 전시회> 같은 기회가 은근히 주어졌다. 그래서인지 인철 선배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를 칭송했다. 나 역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배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그가 궁금했다. 내가 선배와 같은 동아리에 들어간 것도 사실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나를 싫어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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