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랑애 Oct 22. 2024

소설_04. 집요한 지도교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지도교수는 하필 나를 지목했다. 이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제 할머니의 궁전에서 본 뉴스 이야기를 할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그림의 가격을 상생해봤다고 털어놓기엔 더더욱. 미술학도로서 어쩐지 그건 자존심이 상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교수는 예상대로 집요했다.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학생.


그는 나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나는 교수의 기에 눌려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그냥..허탈해서요.


무엇이 허탈하지요?


아뿔싸.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이라니. 이제 꼼짝않고 설명해야 할 불행한 직감이 든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아니나다를까 교수는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지난 학기에 내게 F학점을 선고했던 그 표정. 장학생이 택도 없는 수준의 과제를 제출했다며 남들 다 보는 강의실에서 F를 선고했었는데. 이번에는 그 장학생이 수업시간에 딴생각을 했다고 F를 날릴까. 입학 장학생은 응당 졸업할 때까지 장학생처럼 살다가 나가야한다는 게 교수의 궤변이었다.


그림을 청탁용으로 썼다는 게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난데없이 교수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생각이 많다보니 혓바닥이 산으로 간 건지. F만큼은 이번엔 면해보자는 심산인건지. 하필 이럴 때 당돌해질 건 뭐람. 그래도 이왕 이렇게 판이 깔렸으니 질러나보자 싶었다. 나는 어쩌면 또 재수강을 해야 하겠지.


지도교수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나를 한심해 죽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피식.


뭐래.


몇 학생들이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후.


하지만 교수는 어떤 생각이 났는지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정갈한 와이셔츠에 곱게 매달려있던 진회색 넥타이를 손으로 쭉 잡아뺐다. 좀전까지 단정하게 매여있던 녀석이 죽은 뱀처럼 축 늘어졌다.


탁.

교수는 들고 있던 전공책도 교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에 나는 판결만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수는 내게 자리에 그만 앉으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어제 그 뉴스를 본 학생이 또 있나요?


순간 강의실이 고요해졌다. 교수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쭈뼛거리던 몇몇 학생이 겨우 손을 들었다.


이것밖에 없어요?
다들 미술 전공하는 사람 맞나요?


교수는 퉁명스레 학생들을 질타했다. 그리고 안경을 벗더니 양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과대표가 누구지요?


준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내 남자친구다. 같은 과 동기로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다. 심성은 착하지만 조금 눈치가 없고 소심한 구석이 있는 게 그의 흠이었다.


요새 뉴스 볼 시간도 없을만큼 과제가 많은가요?


준영이 잠시 머뭇거렸다.


대답해 보세요.


새학기라 아무래도 모임이 많습니다!


준영은 쓸데없이 씩씩했다. 역시나 눈치없는 준영다웠다. 거기에 눈웃음인지 분위기 무마용인지 생글거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풉 웃음을 터뜨렸으나, 분위기상 곧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교수의 표정은 우려대로 잔뜩 굳어졌다.


기껏 모임이나 하고 술이나 퍼마시려고 어렵게 대학에 왔나요?


날카로우면서도 단정한 어조였다.강의실 분위기는 더욱더 싸해졌다. 그제야 준영도 웃음기를 거두고 입을 다물었다.


저 학생 말대로 미술계에 또 한 번 허탈한 일이 일어났어요. 나는 이번 사건 뿐 아니라 그동안에도 그림이 청탁용으로 종종 쓰여왔다는 사실이 매우 불쾌합니다.


교수는 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방과 후 지도교수는 나를 교수실로 불러냈다. 오늘은 학교 끝나면 곧바로 할머니를 만나러 갈 참이었는데. 아마 교수는 나에게 집요하게 이것저것 질문을 것이다. 뭐든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미 덕에 논문으로 여러 번 상을 받아온 그였다. 미술계에서는 알아주는 실력파인지라 그를 지도교수로 두었다 하면 취업에도 유리했다. 나 역시 그런 이유로 그를 지도교수로 선택했건만.


똑똑.

문을 열기 전부터 심호흡이 필요했다. 이 상황은 정말이지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 한숨이 절로 났다.

검은 뿔테 안경을 낀 교수는 안경알만큼이나 두꺼운 논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죽은 뱀처럼 늘어져있던 그의 넥타이가 다시 생기를 되찾아있었다. 나는 석연찮은 걸음으로 교수의 책상 앞에 다가가 섰다.


전에 연구하다 불가피하게 중단된 논문이에요.


툭.

교수는 내게 논문집 한 권을 던지듯이 내밀었다. 겉표지에는 <가제: 화백 이태석, 그는 누구인가.> 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미술게에서 새롭게 연구되고 있는 화백이라도 되는 걸까.


원래는 그의 실종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부득이하게 주제를 바꿔야만 했지요.


예? 실종..이요? 아,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서요.


휴. 하마터면 호기심을 들킬 뻔 했다. 나는 얼른 관심없다는 듯 일부러 퉁명스레 말투를 바꿨다. 그래야만 내가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 게다가 미스터리나 범죄로 장르변경이라니. 나는 정말이지 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교수는 무양무양한 성품 탓에 한 가지 주제에 빠져 깊숙히 연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심층논문을 쓰는 것이 어쩌면 그의 야릇한 취미일까 싶을 정도로. 그런 의미에서 이 태석 화백의 실종은 충분히 그의 구미를 당길만  해보였다.


아마도 나를 그의 구성원에 끼워넣을 작정인가 본데, 애석하게도 나는 요새 매우 바쁘다. 준영과의 연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보다 나는 요즘 꽤 큰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요? 학생은 그래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맙소사.

교수는 매우 실망하고 있었다.


"왜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혹여나 미술학도로서 꼭 알아야 할 화백을 놓치고 있는 거라면 내 졸업점수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재빨리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래서 얼른 입을 닫았다.


학생은 미술계에 애착이 남다른 것 같았는데. 정말 모른다고요?


교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계속 질문을 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교수는 그런 나에게 짐을 하나 더 얹어 주었다.


좋아요. 그럼 읽어보세요. 학생이라면 꽤 흥미로워할 것 같아요.


순간 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미술계의 애착이 대단하지도 남다르지도 않다. 그저 당장 졸업 후 무엇을 해서 먹고 살지 오늘 고민하고 내일 한숨 짓는 평범한 졸업 예정자일 뿐이다. 우선은 공모전에 도전할 생각이지만, 안 되면 그냥저냥 비슷한 업종에 꿰맞춰 취직할 작정이다. 교수는 나에 대해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읽고 안 읽고는 학생 자유겠지만, 이 논문에 대해서는 절대로 함구해주세요.

네?


금지된 논문입니다.



맙소사.


뭐라고요?

불쾌했다. 금지된 논문을 내게 주다니.


순간 나는 지도교수를 잘못 만나 경찰에 조사까지 받았다던 한 학우가 떠올랐다. 담당 교수의 거짓 연구에 연루되어 상당한 대가를 치렀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미술계는 되레 학우의 등을 떠밀었다고. 결국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진로를 바꿨다고 들었다.


똑똑.

난감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선명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이전 03화 소설_03. 할머니의 궁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