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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애 Oct 15. 2024

소설_03. 할머니의 궁전.

국도를 달리다보면 지나치기 쉬운 곳. 내비게이션에 주소 입력을 해도 대충 근방이 잡히는 곳. 버스를 타고가면 한참을 걸어야 나오는 곳. 바로 할머니의 산속 궁전이다.


할머니는 왜 그 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을까.


한번도 물은 적은 없지만 대략 예상은 가능하다. 마당 입구부터 현관을 지나서까지 벽이며 바닥이며 빼곡히 미술 작품들이 걸리고 발에 채이는 곳. 이런 공간이 왜 산속에 자리했는지는 감히 물어보면 안될 것만 같다.


애석하게도 유명 잡지에 게재될 만큼 값비싼 미술품은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혹시라도 명화 하나쯤은 세간이 알아봐주지 않을까. 열렬함이 숨쉬는 비주류 미술가들의 장. 그것만으로도 좋다. 배울 것 천지인 미술학도인 내게는.


내가 처음 할머니의 궁전을 발견한 때는 H와 헤어진지 한달쯤 뒤였다. 미술동아리 <피카소>에서 근방 산속으로 1박 2일 엠티를 왔었는데, 이별로 제 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아침에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었다. 다들 나를 찾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내가 미웠었나 보다. 특히나 회장이었던 인철 선배는 내가 일부러 이탈한 줄 알았다는 되도 않는 농담을 후에 했었다.


그후로 나는 거의 매주 할머니를 보러 궁전에 놀러온다. 내가 도착하면 시작되는 할머니와의 놀이. 주제는 늘 똑같다. 궁전 안에 있는 미술품 하나씩 정해놓고 품평 시합하기. 상대의 감상평이 더 그럴듯하면 엄지 손가락을 들고 인정! 외치면 게임 끝. 가끔 주전부리 내기도 했는데 그것 또한 설레는 일이었다. 날 위해 할머니는 늘 싱싱한 과일을 꿀과 함께 블렌더에 넣고 달달달 갈아 주스를 내어주신다. 그것 또한 내가 궁전에 오는 이유다.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할머니가 텔레비전에만 열중이다. 새콤달콤한 주스는커녕 내가 들어온 것도 영 모르는 눈치다. 평소 텔레비전 앞에도 그림이 놓여 있어서, 그저 집안의 구색품 정도인줄 알았는데. 아까부터 쉴새 없이 뉴스를 방출하고 있다.


어떤 국회의원이 고향 후배에게 그림 한 점을 받았다는 로비스캔들. 흔하디 흔한 그런 비리의혹사건.


특이한 점은 그 고향 후배의 존재에 대해 언론이 함구해 왔다는 점이었다. 이 사건으로 요새는 정,재계가 다들 행실을 조심하는 분위기라며. 얽히고싶지 않아서인지 다들 입단속을 해, 증거불충분으로 벌써 여러 차례 수사가 엎어졌다고 했다. 나아가 주말마다 연예인 마약사건으로 이목을 돌리려 했었는데. 그 고향 후배의 몽타주가 드디어 오늘에서야 벗겨진 것이다.


그러니까 M그룹이 블랙리스트에 시달린게 화근이었단 말씀이시죠? 그래서 박 의원을 찾아가 그림을 선물하면서 부탁했고. 보니까 3, 4년 전부터는 M그룹이 계속 업계 실적,평판 다 1위였네요?


맞습니다. 그 후로 박 의원이 기업인의 행사에 자주 얼굴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고요. M그룹과 박 의원의 정경유착설은 부인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뉴스에서는 한껏 격앙된 어조의 기자와 앵커가 문답을 주고받았다. 과거의 보도자료들까지 보여주며 열심히 짝을 맞추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실망스러웠다.박 의원은 평소 미술에 조예가 깊어 나의 호감을 사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름난 미술 잡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아무리 물질만능주의 시대라도 예술을 돈에 "팔아 먹지는" 않아야...


라는 카리스마 있는 직언으로 많은 미술인들의 공감을 샀었다. 그런데 그가 로비스캔들에 얽힌 주인공이었다니. 결국 그도 그렇고 그런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단 말인가.


이것은 모함입니다. 진실은 곧 밝혀질 겁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국민 여러분.


뉴스 화면은 곧바로 박 의원의 기자회견장으로 넘어갔다. 그는 곧 있을 선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했다. 정치적 음모라는 뜻인가. 이렇게 되면 새로운 국면일 텐데.


화면은 어떠한 봉인된 그림을 보여줬다. 기자들의 열띤 카메라 플래시에 번쩍였다. 검찰은 당분간 그림의 실체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왜?


나는 봉인된 그림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저 그림인가 보죠? 정말로 그림을 준 건 맞나보네요. 저렇게 실체가 있으니.


할머니는 그제야 내가 왔다는 걸 알았는지, 곁눈질로 나를 흘끔 보았다. 그러면서도 화면에서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지.


할머니의 답에 나는 재빨리 질문을 덧붙였다.


저 정도 스캔들이면 아무래도 대가의 작품이겠죠? 아무거나 주고받진 않았을 텐데.
누구의 어떤 작품인지 진짜 궁금하네요.


할머니는 쉬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만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나는 할머니의 생각이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려주기로 했다.


위작일 수도 있지.


네?갑자기 왜...근거는요?


위작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테니까.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나는 한층 더 궁금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쳐다봤지만, 할머니는 대꾸해주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비밀을 알고있는 듯 할머니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을 뿐이었다.


기다림의 보람도 없이 할머니는 나를 헛헛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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