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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애 Oct 01. 2024

소설_02. 사랑하는 H

H는 우리대학 체육학과 학생이었다.

나와 같은 해에 입학한 동기다.

어릴 적 시를 쓰시던 할아버지가 어디론가 자꾸 불려갔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조사받던 날 어린 H를 방으로 부르셨다고 했다.


정치로 휘둘리는 내 시가 피를 토한다.
글쟁이 피가 흐르거든 절필을 해라.
사람은 가죽 껍데기가 두꺼워야 돼. 알맹이는 아무 짝에 쓸모없지. 콜록콜록.


공교롭게도 이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되다.

부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H의 아버지는 바깥으로 도는 일이 잦았고, 몇 달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고. 그마저도 늘 술에 절어있어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 아예 뵌 일조차 없다고.


그 강물이 아마 화장터였을 거야.
어릴 때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
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이제 엄마랑 안 싸울 거잖아.


그 후 모친과 단둘이 집을 줄이고 줄여 숱하게 이사를 다녔다던 H. 덕분에 그의 학창시절이라곤 새로 전학 학교 교단에 서서,


안녕? 이번에 전학 온 이한수라고 해. 잘 부탁해.


라고 인사했던 기억뿐이라고.


근데 또 언제 전학갈지 몰라.


이 말이 늘  생략되어 있었단다.


그러니까 전학다니느라 공부에 맘붙일 새 없었고,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H는 문학 대신 체육학을 선택했다고.


핑계다.

그러기엔 우리대학은 체육학과가 정평이 나 있다.

학교 안에는 현역 운동선수도 많고, 체육학과를 지원하는 시설도 집중돼 있다. 교정에서 가장 큰 건물이 체육학과 건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대회 메달 없이 우리 대학에 들어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들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H는 사실 꽤 높은 점수로 입학했다고. 이래저래 그는 체육학과 팔방미인 아니 팔방미남다웠다.


그러니 그와 사귀는 나는 자연스레 미운 오리가 되어 버렸지.


내가 잘생긴 게 죄다.


H는 웃어 넘겼지만, 나는 학교다니는 내내 시기와 질투로 휴학을 고려할 만큼 가는 곳마다 심각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도 버틸수 있었던 건 그와 내가 죽고 못 사는 연애를 한 덕분이었다. 방과후 연애는 정말이지  신선하고 짜릿했다.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하던 1학년 봄 축제.

내가 속한 미술 동아리 <피카소>에서축제기간 주점을 열었다. 미술 동아리에 걸맞게 한쪽 부스에 학우들의 작품을 쭉 진열해놓고 인기투표도 받았다. 당 동아리 회장이었던 인철 선배는 재미로 하는 거라면서도 어지간히 나를 채근했다. 그의 등쌀에 결국 나도 그림 한 점을 부랴부랴 내놓았는데, 정작 선배는 내 그림을 놓고 우리 동아리의 수치라며 꽤나 구박을 했었다.


그럼 제 거는 떼어주세요.
그러게 전 처음부터 빼달라고 했잖아요.


아니지 아니지. 두고두고 봐야지. 우리 <피카소>의 수친데. 그래야 다시는 이런 그림 못 내놓는 거야.


이게 말이야 방귀야.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이런 식으로 물먹인다고?


어쨌든 주눅이 들어 내 그림을 구석자리로 옮겨 붙였다. 조용히 주점 준비를 시작하느라 종이컵 박스를 뜯고 있는데 H가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들어왔다.


가만 있자, 이게 네 그림이지?


그리고 내 그림에 초콜릿을 양껏 달아줬다.


내 여자친구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네 그림이 여기서 제일 좋은데?
못 믿겠지만 나 그림 볼 줄 알거든.


그러게요. 저도 꽤 공정한 사람인데
진짜 제수씨 그림이 제일 훌륭해요.

잠깐. 제수씨? 형수님이지.

제수씨지, 임마.

스읍, 어허! 형수님!


H와 친구들이 티격태격 장난치며 웃는 사이, 인철 선배가 슬쩍 끼어들었다.


다 붙였으면 이만 비켜주시죠. 손님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친이라고 아무 그림에나 막 붙여주시면 곤란한데.

여친이라서가 아니라요. 눈 있으면,


야야, 앉자 앉아. 어디 매상 좀 올려드려 볼까?승철이한테 전화해서 애들이랑 방황하지 말고 여기로 다 오라고 해.


H와 친구들은 어느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이어 H의 친구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어찌나 많이 불러 모았는지 전체 테이블을 꽉꽉 채워버렸다. 매상을 올려준다는 말에 그들을 내쫓지도 못한 인철 선배는 씩씩거리며 주문을 받았다. 나를 한 번 곱지않게 흘기고는 뒤편의 주방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내가 애들한테 오늘 부침개라도 쏘려고.


H는 메뉴판에 시선을 떼지않고 말했다.


아니야, 안 그래도 돼.


나는 당황해서 말렸지만, 그는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벌떡 일어섰다.


얘들아! 우리 오늘 50일이다!
기념으로 내가 각 테이블 파전 하나씩 쏜다!
민망하지만 다들 축하해 줘!!


민망하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는 호방한 얼굴로 손까지 흔들었다. 어차피 모든 테이블이 H의 친구들이긴 했지만, 나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간질간질. 사랑 받아 설레는 느낌이 이런 걸까.


와아!! 풋풋한 50일이랜다. 니네 꼭 결혼해라!!


테이블마다 그의 친구들이 박수와 환호를 쏟아냈다. 장난스런 야유도 절반은 섞여 있었다. 이에 H는 내 손을 더 꽉 잡고는 날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나를 가슴팍에 확 끌어안았다. 나는 뭐라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그에게 밀착됐다. 워낙 낯을 가리는 성격인 나는 이 상황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당연하지! 고맙다!


휘익! 이한수 임자 제대로 만났네.


친구들이 휘파람까지 분 덕분에 환호성 소리는 더욱 졌다. 그 바람에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걸음을 멈추고 우리 부스를 기웃거렸다. 나는 얼른 H의 품에서 살짝 떨어졌다. 마침 주방에서 강냉이 접시들을 양손에 들고 나오던 인철 선배는 나를 다시 한번 흘겼다. 이래저래 내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선배는 나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싫어했으니.


이런 이벤트는 좀 당황스럽나?
근데 나도 구경꾼이 많아서 되게 쑥스럽네.

H는 새빨개진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부끄러운듯 머쓱하게 웃는 그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건  색다르게 혹적이었다. 단연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 단둘이었다면 아마 달콤한 키스를 해줬을 텐데. 나는 얌전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쨌든  일로 우리는 대학 내에서 꽤 유명한 연인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동아리 내 전해지는 낭만적인 전설의 주인공이다. 물론 는 그 날 이후 더 많은 여학우들의 견제와 질투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과에서 나아가 학교 전체에 연애를 선포한 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았던 우리도 어느 한 순간을 참지 못하고 이별을 했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와 내가 한번도 온정을 나누지 않은 듯이. 다음 해에 다시 만난 아카시아 꽃잎은 년의 나를 모른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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