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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애 Sep 24. 2024

소설_01. H와의 만남.



미술학부 1학년 1학기 초.

그러니까 내가 미술 동아리에 가입하기도 훨씬 이전.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첫미팅을 했다.

거기서 만난 체육학부 H.


나갈래?


???


여기 너무 재미없지 않아?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H가 나를 따라와 했던 말이었다.

그날 미팅에 참여했던 여학우들은 대부분 H를 점찍어 두었었고, 나 역시 훤칠한 외모의 H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었다.


하지만 경쟁자가 많다보니 내 차례까지 올 것 같진 않았는데.


우리는 그 날 그 길로 미팅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손잡고 카페에 갔고, 저녁 식사도 했다. 다음날에도 만나 조조 영화도 봤는데 제목이 뭐였더라. LOVE가 들어가는 거였는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녀 주인공이 빌딩 옥상에서 뜨거운 키스를 하며 추락했던 엔딩장면밖엔.


그날 밤 우리가 뜨거운 첫키스를 나눴다는 건 오히려 또렷이 기억한다. 추락따윈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순진했던 나의 스무살치곤 꽤 담대한 용기였다.

모든게 H에게만큼은 쉽게 허락되었다.


그래서 내가 쉬워보였나.


그와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학교에 간 월요일.

미팅 자리를 주선했던 여자 아이가 나를 불러냈다.


김연희.

새침한 외모에 웃을때 양옆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까닭에 남자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입학 이후 자기돈을 주고 학식을 사먹어본적이 없다고.


너 내가 체육과랑 미팅 주선하느라 얼마나 애썼는줄 알아?


그런데?


너 이한수 데리고 중간에 도망갔잖아!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도망'이라는 단어 때문인지 '이한수'라는 이름 때문인지 강의실에 있던 몇몇 학생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그래서?


나도 질 새라 대꾸했다.


울 오빠가 체육과 과 회장이거든?
내가 이한수 만나려고 오빠한테 식권까지 갖다 바치면서 마련한 자리였어!
근데 네가 걜 데리고 중간에 도망을 가?


그녀는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그랬니? 몰랐어.


이게 어디서 손 안 대고 코를 풀어?


그리고 내게 손까지 쳐들었다. 새침한 외모와는 달리 손버릇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기가 찼다. 조금은 억울했다. 정확히는 H가 내 손을 붙잡고 도망간 거였는데.


나 코 푼 적 없는데?


내 비아냥에 몇몇 학생들이 코웃음을 쳤다.

김연희는 완전히 뒤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고보면 나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나 보다.


나한테 이러지 말고 한수한테 가서 직접 말하지 그래?


뭐?


그래도 늦었지. 이미 나 걔랑 사귀기로 했는데.


뭐? 이게!!


그녀는 완전히 넉다운되었다.

보다 못한 그녀의 친구들이 와서 그녀를 붙잡았지만, 그녀는 이미 내 머리끄댕이를 잡아버린 뒤였다. 내가 앉아있던 책상을 발로 차 가방도 흐트러졌다. 결국 남학생들까지 달려와 그녀를 뜯어말리고 나서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러고도 연희는 뭐가 그리 분한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과 동기인 준영이 다가와 내 책상을 일으켜주며 가방도 챙겨줬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아이씨, 자존심 상해!
엉엉.


머리끄댕이를 잡힌 건 나였지만, 그날의 진정한 패배자는 김연희였다,


그후로 그녀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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