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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애 Oct 27. 2024

소설_08. 그림의 등장

일주일이 흘렀다.

뉴스는 이제 로비스캔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엊그제 잡힌 연쇄살인마에 대해 온갖 정보가 쏟아진다. 여론은 완전히 그쪽으로 넘어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지도교수 역시 내게 논문에 대해서는 더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물론 교수의 강의시간에는 시작 시간에 딱 맞춰 맨 뒷자리에 살금살금 들어가 앉는 일이 익숙해졌지만. 어쨌든 나는 요새 학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오가고 있다.


추위가 제법 풀린 봄날의 문턱. 나는 지금 콧노래를 부른다. 벌써부터 봄꽃 냄새가 난다. 아직은 아침 저녁으로 일교차가 심해 스웨터를 벗진 못했다. 겨드랑이로 땀이 차오르기 전에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린다. 모든 게 좋다. 나는 H를 잃어버린 대신에 할머니를 얻었다. 그리고 오늘은 할머니를 만나러 궁전에 가기로 한 날이다.


<피카소> 겨울 엠티에서 나는 산책을 나섰다가 길을 잃었다. H와 이별한지 얼마안됐을 때라 나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다간 미쳐버릴것 같아 뭐라도 해보자고 나선 거였는데. <피카소> 내에는 인철 선배 때문 나를 챙겨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은근 H와의 이별을 고소해하며 나를 눈엣가시 취급했다. 다행히 산길을 헤매다가 제일 먼저 발견한 집이 할머니의 궁전이었다.


일행을 잃어버려서 어쩌니. 연락은 계속 안 되는 거야?


네.


될 리가 있나. 인철 선배는 내 번호를 아예 차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 채 내부를 구경하기 바빴다. 현관 입구부터 곳곳에 미술품이 놓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시회를 방불케하는 그림들과 바닥에까지 놓인 미술품들. 수준도 꽤 높아보이던 터라 미술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내게 따뜻한 레몬차를 내주었다.


혹시 여기, 미술관인가요?


아니.


예전에 미술관이었나요?


아니.


그럼 앞으로 혹시 미술관을,


그것도 아니.


그럼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일반 가정집에 있을 수 있죠?


할머니는 그런 반응일 줄 알았다는 듯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미술에 관심이 많니?

제 전공이에요.


살짝 우쭐대며 말하는 나를 할머니는 귀여워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알아볼 만한 유명 작품은 없었다. 아이러니했다. 어쩌면 모든 게 할머니의 작품일까.


내가 모은 것도 있고, 맡아둔 것도 있고 이것저것.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 작품은 아니야.


나는 거실 벽에 걸린 풍경화를 감상하다가 할머니를 휙 돌아보았다. 내 속마음을 읽다니. 혹시 내 앞에 서 있는 할머니는 산속의 마녀일 수도.


그렇다고 마녀도 아니지. 지킴이 정도로 해두자.


나는 너무 놀라 동공이 더 확장되었다. 일순간 온몸에 소름이 지나갔다.


뭘 그렇게 놀라. 아까부터 네 얼굴이 그렇게 묻고 있는데. 이런 투명한 아가씨 보게나. 홍홍홍. 아니지 친구 없는 아가씨인가? 어쩜 이렇게 다들 찾지도 않아? 천천히 구경해도 되지만 그건 참 안 된 일이구나. 사람이 난 자리는 티가 나는 법인데. 쯧쯧.


전 여기 오길 참 잘한 것 같은데요. 마음에 들어요.


친구도 없으면서 나랑 친구를 먹으려고 드네.


할머니는 피식 웃음을 내보였다. 톡톡 쏘는 말투 안에는 뼈가 있었다.


저 여기 못 찾았으면 산속에서 얼어 죽을 뻔 했잖아요. 얼마나 다행이에요. 이런 곳이 있어서.


죽는 게 두려워?


두렵다기 보다... 발견되기 전에 산짐승이 뜯어먹으면 어떡해요. 그건 모양새가 영.


뭐? 파하하하하하하.


할머니는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진심을 말했는데 그게 그렇게 웃을 일인가.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여자는 죽는 순간까지 예쁘게 보여야지. 암.


여자요?


그래. 여자. 괜찮아. 너는 충분히 예뻐.


여자라는 단어에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래 나는 여자다. H와 진하게 사랑을 나눌 때에 확인했던 그 생물학적 여자. 그것말고도 뼛속까지 오로지 그냥 여자. 게다가 볕 좋은 스무 살.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남자와 헤어졌지만 그래도 괜찮은 나이의 싱그러운 여자. 이제 겨우 스무 살. 그리고 여자.


가끔 조난당해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싱싱한 대화는 오늘 네가 처음이다. 합격이야. 내 집은 몰라서 못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어. 그래서 우리 회원들도 여길 <마녀가 사는 궁궐>이라고 부르지. 가끔 놀러와. 아주 흥미로울 거야. 홍홍홍.




할머니와의 첫 만남을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궁전에 도착했다. 그런데. 현관에서 구두를 벗다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체의 '귀'를 자세히 묘사한 그림인데, 단순히 세밀화라고 치부하기엔 어쩐지 싸한 느낌이 있었다. 벌써 몇 년 째 할머니의 궁전에서 수많은 그림을 봐왔지만,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아니 이런 걸 왜 현관 입구에 걸어두셨대. 깜짝 놀랐네!

나는 구두를 벗으며 툴툴거렸다. 그림의 기운에 놀란 탓인지 구두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무심결에 벽을 잡는데 그림 하단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 이 태석.


나는 순간 교수가 줬던 논문이 떠올랐다. 사물함 속에 쳐박아둔 뒤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종이뭉치. 인철 선배가 그렇게 나서지만 않았어도 앞부분은 들춰봤을 텐데. 아무튼 이게 다 그 치졸한 자식 때문이다.

딱.

구두 한 짝이 나동그라지며 현관 대리석 바닥을 찰지게 때렸다. 그 소리 때문인지 어느새 할머니가 나를 빼꼼히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두 번 놀라 소리를 빽 질렀다. 할머니는 그런 내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현관 모퉁이로 날아간 구두를 집어 정리하고는 따라 들어갔다.


현관에 저 그림 뭐예요? 저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유명한 작품이에요? 아, 그리고 화가가 이 태석이에요? 할머니 이 태석 화백 알아요? 실은 교수가 줬던 논문이 있는데요 그게 금지된, 아차.


숨 넘어갈 듯 질문을 다다다 쏟아내다가 내가 말을 멈추자 할머니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채 나를 주시했다. 나는 교수의 충고대로 논문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그것은 나의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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